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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으로 인한 편가름 다시는 없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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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봄이 오는 섬나라 제주도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참으로 제주의 봄은 그냥 따뜻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4·3을 지나서야 마음을 다스리고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제주 사람들의 관성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 제주를 찾았던 르클레지오는 제주도를 “잔인한 냉전 역사 뒤로 삶의 욕구가 가득한 향수의 섬”이라고 기행문에 적었다. 죽음으로 얼룩진 4·3사태의 그늘이 드리운 제주도에 생기가 돋아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비탄 속에 피어난 생생한 삶에 눈을 돌렸다.

4·3을 빚어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4·3은 단순하게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시대적 복합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힘을 가진 미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국가를 건설하면서 외딴섬 제주 사람들을 국민으로 포섭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주의 역사·문화, 사람들의 공동체적 정서와 집단 심성을 이해했다면 강경한 토벌과 주민 살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948년 4월 말 평화협상을 깨뜨린 하지 사령관의 강경 진압 지시, 브라운 대령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때 제주 사람은 토벌 대상일 뿐이었다. 조병옥 박사와 송요찬 9연대장,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선무작전을 일찍 펼쳤다면 2만 명 이상의 떼죽음은 비켜갔을 것이다.

48년 6월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간 박근영 검찰관의 말대로 “수습은 무력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지적이 왜 같은 국가 운영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을까. 김익렬 9연대장과 같이 “제주도 내 각지에서 야기된 전고(前古)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보는 측은지심이 없었을까.

4·3의 대참상은 인간의 이성으로 정리되지 않는 복잡다단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참사에서 살아난 제주의 청년들은 해병대 3·4기로 자원 입대해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에 섰다. 국가가 버린 제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제주섬은 60년대 이후 국가 개발의 주요 대상이 되면서 산업화와 국가 성장의 주요 모델이 됐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4·3의 진실이 드러나고 특별법을 통한 해결의 과정을 순탄하게 밟아 왔다. 다시금 4·3으로 인한 명예훼손이나 편가름, 힘센 자의 억압은 더 이상 없을 것으로 제주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진정한 국가라면, 국가의 지도자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면 선량한, 힘없는 변방 섬의 국민들을 중앙의 시각과 이념적 잣대로 마름질하지 말기를 다시 오는 4월에 간절히 기도해 본다.

*본 난은 16개 시·도 50명의 오피니언 리더가 참여한 중앙일보의 ‘전국열린광장’ 제7기 지역위원들의 기고로 만듭니다. 이 글에 대해서는 ‘전국열린광장’ 인터넷 카페(http://cafe.joins.com/openzone)에 의견을 올릴 수 있습니다.

박찬식 제주4·3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