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손벌릴 일 없는 프랑스 정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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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살림을 꾸려가는 입장에서 은행잔고가 두둑한 것보다 더 흐뭇한 일이 있을까. 프랑스 사회당 (PS) 재정국장을 맡고 있는 알랭 클라에 하원의원이 요즘 꼭 그런 기분이다.

지난 총선에서 승리한 덕분에 PS가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보조금이 내년부터 크게 늘어나는 까닭이다.

클라에 국장은 내년도 당세입 규모를 국고보조금 1억7천만프랑 (약 2백84억원) 과 당비수입.의원 기부금 등을 합해 총 1억9천4백만프랑 (약 3백24억원) 으로 늘려잡았다.

1억1천5백만프랑 (약 1백92억원) 인 올 살림규모에 비해 무려 70% 가까이 늘어나는 셈이다.

덕택에 클라에 국장은 돈 쓸 곳을 찾느라 '행복한 고민' 에 빠져 있다.

산하 유관단체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늘리고 그동안 쪼들린 살림을 하면서 진 빚도 말끔히 갚을 계획이다.

또 '궂은 날' 에 대비해 여유자금도 비축해둘 생각이다.

반면 지난 총선에서 패배한 우파의 공화국연합 (RPR) 재정국장인 에티엔 팽트 하원의원은 1억6천만프랑 (약 2백67억원) 이었던 국고보조금이 내년부터 1억1천만프랑 (약 1백84억원) 으로 줄어들게 돼 벌써부터 허리띠를 졸라맬 걱정이 태산같다.

선거결과에 따라 각 당 재정국장의 희비가 엇갈리는 것은 지난 95년 도입된 개정선거법의 영향이다.

그 전까지는 기업 등 법인의 정치헌금이 각 당의 중요한 자금줄이어서 정치자금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개정선거법은 법인의 정치헌금을 일절 금지했다.

대신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 지급액을 현실화했다.

이제는 국고보조금이 각 당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개정선거법은 총선에 50명 이상의 후보를 내세운 정당에 대해 전체 국고보조금의 절반은 총득표수, 나머지 절반은 의석수를 기준으로 비례배분토록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 예산안은 내년도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 총액을 5억3천만프랑 (약 8백85억원) 으로 책정해 놓고 있다.

또 선거에서 5% 이상을 득표한 후보에게 선거법상 선거자금 상한액의 50%를 환불해 주는 선거공영제도 운영되고 있다.

선거법 개정으로 프랑스 정치인들은 돈걱정 없이 기업들에 더이상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에게 프랑스 사례는 타산지석 (他山之石) 조차 안되는 것일까.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오히려 '돈선거' 를 조장한다고 비난을 자초하고 있으니 말이다.

배명복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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