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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일을 절반으로 줄여 보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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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려대 총장을 지낸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장이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MB)을 향해 “일을 줄이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어 위원장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의 약점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라며 지금 하는 일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청와대 쪽에선 MB가 많이 달라진 걸 모르는 생뚱맞은 소리라며 언짢다는 반응이지만 지금의 MB에게 가장 필요한 보약이지 싶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굵직한 역점 사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정책을 해당 부처장의 책임과 재량에 맡기고 있다고 강조한다. 출근도 늦게 하고 휴일엔 쉬는가 하면, 골몰히 사색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에 MB는 소소한 것까지 직접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으로 비친다. 엊그제 식목일 건만 해도 그렇다. 산림청장이 전반적으로 따뜻해진 한반도의 기후변화를 이유로 식목일을 3월로 옮겨야겠다고 제안했으나 MB가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4월 5일=식목일’로 굳어졌는데 굳이 바꿀 이유가 있느냐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 중요 행사 날짜를 변경하는 일은 중대 사안이라 대통령이 관여하는 게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국경일도 아니요, 한낱 나무 심는 날까지 이래라 저래라 한대서야 대통령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갈수록 조여오는 경제위기와 긴박하게 돌아가는 북한 미사일 문제 등 화급하고도 굵직한 현안에 비교하면 지엽적 문제다. 이런 정도는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논의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MB는 장관이 단독 보고하는 것보다 실무 담당 국장들을 대동해 보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세세한 내용까지 실무 책임자에게 묻고 토론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 장관의 증언이다. 그는 MB가 국정의 전 분야를 두루 꿰뚫고 있고 식견도 해박하다며 은근히 MB 띄우기에 열을 올렸다. 특히 경제 분야에 관한 한 보고서의 틀린 숫자까지 지적할 정도로 꼼꼼하게 짚어 관계자들이 진땀을 흘린다고 한다. 경제위기 시대에 경제에 밝은 대통령을 모신 게 큰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회사 CEO 때의 실물 경험과 업적에 너무 경도돼 매크로 현상을 간과하는 건 아닌지 우려도 뒤따른다.

대통령도 사람이다. 전지전능할 수 없고, 복잡하게 얽힌 국정의 전 분야를 모두 챙길 수는 없다. 세세한 분야까지 관여하다 보면 세목별로는 내용이 충실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전체 숲은 엉망으로 엉클어질 수 있다. 웬만한 일은 임명한 사람들을 믿고 맡기고 대통령은 큰 그림에 집중해야 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총리의 역할이다. 한승수 총리는 국정 경험이 풍부하고 대중의 신망도 두터운 편이다. 그를 왜 좀 더 중하게 활용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총리에게 권한과 업무를 대폭 이양하면 대통령은 그만큼 짐을 덜게되고 중요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루거나 미래 비전을 가다듬는 데 정력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 위원장의 조언은 짧지만 그 속엔 더 많은 안타까움과 질책이 담겨 있다고 읽힌다. 그는 MB의 고려대 경영학과 2년 후배에다 지금은 중요한 위원회 책임자로 MB 정부를 돕고 있다. 그러한 관계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삼켜 절제하고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다. 만약 그의 발언을 ‘맞는 말을 싸가지 없게’ 한다는 모씨 스타일로 바꿔 말한다면 듣기 민망할 정도의 험한 욕설이 될지도 모른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속내는 ‘제대로 좀 하십시오’라는 질책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뛰어넘으려면 국력을 한데 모아 돌파해 나가는 역동적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한데도 그런 시도조차 찾아볼 수 없다. 청계천을 성공으로 이끈 설득과 갈등 해결의 리더십이 바로 이럴 때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을 터인데 그 솜씨를 꺼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여기저기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것은 분명하나 구체적 실적은 보이지 않아 갈팡질팡한다는 인상마저 준다. 위기 극복의 구체적인 시나리오나 국가 미래의 비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아 국민들은 불안한 것이다.

MB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많은 이의 걱정이 어 위원장의 속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어 위원장의 권유처럼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큰 그림을 그려내길 기대해 본다.

허남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