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붉은 악마' 애용 적절치않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붉은 악마 (Red Devil)' 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인기의 물결을 타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애용하는 붉은 유니폼을 입고 열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붉은 악마' 들에 대한 관심도는 축구에 쏠리는 국민적인 성원과 함께 날로 고조 (高潮) 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매스컴의 영향력, 특히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그것을 통감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애당초 '붉은 악마' 라는 말을 매스컴이 쓰기 시작한게 잘못된 번역에 원인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 라는 말이 우리나라 매스컴에 등장한 것은 지난 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대회 관련 보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당시 한국팀이 예상을 뒤엎고 4강에 오르자 현지 언론이 '레드 퓨어리스 (Red Furies)' 라 표현했다고 외신 (外信) 은 전했다.

이것을 우리나라 언론이 '붉은 악령들' 또는 '붉은 정령들' 이라 번역해 보도했고 그로 말미암아 '붉은 악마' 란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영어사전에 '퓨어리 (Fury)' 라는 말을 찾아보면 '격분' '격정' '열광' 등의 뜻풀이와 함께 '퓨어리스 (Furies)' 라고 쓸 때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복수의 여신' 또는 '원령 (怨靈)' 을 뜻한다고 풀이돼 있다.

따라서 '레드 퓨어리스' 를 '붉은 악령' 이라고 번역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어를 제대로 옮기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이나 용어엔 이른바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올바른 번역이 될 턱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퓨어리' 는 멕시코에선 '푸리아 (Furia)' 라고 하는데, 이 말의 라틴말 어원은 '푸로 (Furo)' 라는 사정을 모르고는 엉뚱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푸리아' 도 그렇지만 '푸로' 란 말은 '신속한 것' , '재빠른 것'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퓨어리스' 는 한국 축구팀의 놀라운 기동력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번역 못지 않게 지레 짐작하고 글을 쓰거나 옮기는 일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붉은 악령들' 또는 '붉은 악마' 라고 번역한 저변만 하더라도 잘못된 번역에 못지 않게 잘못된 전제 (前提) 조건이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레드 퓨어리스' 라는 외신의 표현이 현지의 우리 팀에 대한 '시샘' 과 '질시' 가 깔려 있는 것이란 전제 아래 '붉은 악령' 이라고 번역했다는 일부 언론의 해설에서도 드러난바 있다.

이것은 우리의 고식적인 콤플렉스의 발로 (發露) 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우리를 외국 사람들이 시샘하고 비하한다는 망상처럼 어처구니없는 것도 없을성 싶다.

더군다나 축구경기에서 '날쌘 붉은 용사들' 이란 외국 언론의 표현이 우리나라에선 '붉은 악령' 또는 '붉은 악마' 란 번역으로 둔갑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잘못된 번역에서 비롯된 '붉은 악마' 가 이젠 보통명사인양 애칭되고 광범위하게 수용되기에 이른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물론 단순히 스포츠 응원과 관련된 현상이기 때문에 구태여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 이란 그것의 유행이나 수용정도를 그렇게 가벼이 보아선 안된다는게 뜻있는 이들의 지적이다.

'말' 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회의 심층심리 (深層心理) 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그동안의 우리나라 언어풍속도 (言語風俗圖)에서 '악마' 란 말은 결코 애칭되거나 선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악마' 가 선호되는 상황이란 일반적으로 '악' 또는 '악마' 가 득세하고 그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한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게 확고한 우리 생각의 틀이었다.

만약 이러한 틀이 흔들리거나 무너진다면 거기엔 엄청난 사회적 재난이 배태될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란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기피 대상이 돼야 할 '말' 이 어떤 이벤트를 계기로 애호의 대상이 되는 전환의 절묘함이 사회심리와 앞으로의 변화에 어떻게 연결될지는 커다란 주목거리며, 그것은 심층취재의 대상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를 보면 '데블 (Devil)' 이라는 말이 '애칭' 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스포츠팀의 애칭으로는 사용빈도가 높은 축에 든다.

'데블' 이란 우리말로 번역하면 '악마' 인데, 우리말의 악마와 영어의 데블은 문화적 격차 만큼이나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우리말의 '악마' 는 그야말로 '나쁜 것' , '악신 (惡神)' 을 뜻하는데 반해 영어의 '데블' 은 '악마'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한 정력가' 나 '맹수' , 심지어 '매운 음식' 까지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특히 '레드 데블' , 곧 '붉은 악마' 라는 것도 '핫 소스' 의 상표에 '레드 데블' 이 있는가 하면, 붉은 베레모를 쓰고 있는 영국 공수부대의 애칭도 '레드 데블' 이다.

그리고 영국 축구의 명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의 애칭도 '레드 데블' 이다. 이런 영.미 (英美) 적인 기준에서 보면 우리나라 축구를 응원하는 모임인 '레드 데블' 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준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붉은 악마' 의 정식명칭인 '붉은 악마 서포터스 (Red Devil Korea Supporters Club)' 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을 응원하는 한국인들 쯤으로 엉뚱하게 오해될 염려마저 없지 않은 것이다.

이규행 <본사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