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A씨의 시사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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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모두 후세에 엄중한 교훈을 남기는 '사건' 들이라고 A씨는 생각했다.

그래서 후세를 가르칠 개인용 시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그 어려운 작업에 착수했다.

대목마다 17세기 스페인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경구 (警句) 를 단 것이 그가 짓는 시사교과서의 특색. 편년체와 통사 (通史) 를 혼합한 그의 초벌작업을 잠깐 실례해 보니 - .

1.한보사건으로도 정경유착은 알 수 없다.

5조원이 넘는 돈이 은행장과 '깃털' 사이의 눈짓으로 대출된 이 사건은 세상에서 말하는대로 정경유착이 아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정경유착의 몸통은 없다.

수사도 소용없고 청문회도 헛일이다.

▷남의 죄를 들추는 사람이 되지 마라. 타인의 오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오명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2.대마역사 (大馬亦死)가 정석 (定石) 이다.

진로.기아등 대기업이 속속 쓰러지는 것은 대마불사 (大馬不死) 란 바둑의 정석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둑에선 그것이 통하나 장사에선 안 통한다.

역시 대마역사다.

▷끝을 생각하라. 행운이 문지방까지 따라가는 자는 얼마 안된다.

3.경선 (競選) 은 무용지물. "신한국당 7룡 가운데 누가 대통령 후보로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런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대통령 후보를 뽑았다면 막대한 비용만 낭비한 경선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남을 험담하는 자는 역시 남들의 험담을 듣는다.

그들의 수가 많으면 그는 굴복하게 되고 만다.

4.경선은 그래도 해볼만 하다.

앞의 교훈을 반대하는 이가 많아 부득이 양론을 다 기록한다.

낙선자도 출마하는 당내 경선이 쓸데없는 짓만은 아니란 주장이 있다.

경선은 정치인들의 '국민적 오락' 의 실력을 높여 준다는 것이 그 논거. 못 먹어도 고, 광 팔기 등의 고차원 기술이 개발되기 때문이란다.

▷경쟁자가 이미 좋은 쪽에 섰다고 고집을 부려 나쁜 쪽에 가담하지 마라. 5.모든 비자금 조성 의혹이 다 수사 대상은 아니다.

유력한 정치인이 아들.처남.사돈의 이름으로 돈을 감춰놓은 의혹이 폭로됐다.

폭로와 진실 규명이 다른 것은 순전히 시기의 문제다.

문민개혁 초기의 폭로는 발본적 (拔本的) 수사가 되지만 말기의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다.

▷미움을 사지말고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마라. 존중받는 것을 소중히 여겨라.

6.비전 제시한 DJP연합. 한국 정치의 고질인 안개 정국을 걷은 것이 DJP연합의 중요한 성과다.

앞으로 2년반은 대통령 책임제, 그 후론 내각책임제 아래서 우리는 살게 된다.

3金청산은 공허한 타령이고, 확고한 3金체제로 21세기를 맞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 기록이 너무 성급한 추측이라면 나중에 수정작업을 벌일 것을 약속한다) .

▷그대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계획에 가담하라. 이는 목표에 도달하는 멋있는 전략이다.

7.잘못 기록된 11월 대란설. 다른 시사교과서에는 자주 오기록 (誤記錄) 이 등장한다.

대선 구도에 중대변화가 온다는 11월 대란설이 당초 10월 대란설로 기록된 것은 잘못이다.

주류.비주류.탈당파.잔류파의 여당내 사색당쟁이 확실한 대란으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은 빈정거릴줄 알아야 한다. 빈정거리면 잘못이 시정되는 수도 있으니까.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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