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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 시대를 잘못만난 천재화가…간송미술관서 100주기 기념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말갈기는 세필로 가늘게, 그리고 굵은 등걸은 짙은 먹을 듬뿍 찍어 휙하니 그려놓은 그림은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 목불식정 (目不識丁) 의 무학에 어깨너머로 배운 그림솜씨란 말을 듣고 나면 어딘지 미심쩍어 보인다.

왜 일까. 조선왕조 말기 이처럼 성격짓기가 애매모호하기만 한 대단한 천재가 등장했다.

그는 무슨 그림이든지 한번 보기만 하면 척하고 그려낼 수 있는, 하늘이 낸 천재였다.

그렇지만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에는 도무지 상관치않고 역사밖에서 자오 (自娛) 했던 천재가 오원 장승업 (吾園 張承業 1843 - 1897) 이다.

올해는 그가 타계한지 1백년 되는 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全暎雨) 부설 간송미술관에서는 '오원 백주기 기념전' 을 열고 있다.

(11월2일까지 02 - 762 - 0442) 대표작인 '풍진삼협도 (風塵三俠圖)' '팔준도' 병풍과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신선그림.화조그림등 20점이 소개중이다.

그의 사후 1백주년이 의미를 갖는 것은 좋든 싫든 그의 존재가 한국근대미술 출발의 첫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11년 서울 백목다리 (현 광화문 교육회관 건너편) 근처에 최초로 근대적 미술학원인 서화미술원 강습소가 개설됐다.

지도교사는 소림 조석진 (小琳 趙錫晉) 과 심전 안중식 (心田 安中植) .두사람 문하에서 오일영.이용우.김은호.이상범.노수현같은 화가들이 배출돼 이들로부터 근대.현대 한국화가 열렸다.

소림과 심전은 1880년대 중반부터 오원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다.

오늘날 한국화의 뿌리를 찾는데 오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본관 조차 분명치 않은 고아출신의 오원은 총각 서울에 굴러들어왔다고 한다.

수표동 이응헌의 집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어느날 어깨너머로 본 그림을 흉내낸 것이 기막힌 매화그림도 되고 난초그림도 돼 저절로 화가가 됐다.

당시 그가 본을 삼은 것은 장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중국 그림.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에도 중국의 누구와 누구것을 베꼈다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그의 모방은 명대 절파풍 (浙派風) 의 신선도에서부터 청대의 산수.화조.기명절지 (器皿折枝) 그림에까지 두루 걸쳐있다.

그렇지만 '거의 실패가 없었다' 는 평이 일반적이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들어왔음직한 수채화를 본딴 그림 ( '眉山梨谷圖' ) 마저 있다.

그런 천분 덕에 화원이 되고 벼슬도 얻었다.

그가 남긴 그림은 약 4백여점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원을 말할때 뒤따르는 애매함은 전통과의 단절이 그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중 시속 (時俗) 을 떠난듯한 산수화와 화조화는 당시 도저한 학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그림이라고 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는 단 한가지 재능만으로 그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그점에서 그는 전통을 끊은셈이 된다.

하지만 새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고, 자신도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천부적 재능은 있었지만 시대는 만나지 못한 어긋남 속에 기묘한 일생을 보낸 천재작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간송미술관 전시에 제자인 심전.소림의 그림이 나란히 소개된 것은 현대한국화의 혼돈이 아마 그에게서 비롯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같다.

최완수 (崔完秀) 연구실장은 그의 모습을 묻는 물음에 “둥글넓적하고 데면데면했을 것 (그림 '鹿受仙經' 속의 인물)” 이라고 답하고 있다.

윤철규 미술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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