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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통해 피사체에 새롭게 접근해요”

중앙일보

입력

수년간 중국 베이징 풍경에 푹 빠져 있는 박애란 작가. 젊은이답지 않게 오프라인 활동이 왕성한 사진가다. 그녀가 최근 신발만 찍고 다니며 관계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각종 예술단체와 문화원에서 앞 다투어 전시 제안을 하지만 그녀는 올해 한두 번의 전시회만 갖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찍는 속도를 더 늦춰야겠다고 맘 먹었기 때문이다. 스물아홉. 아직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 더 좋아할 나이건만, 작가의 사진에서 서서히 서민들의 삶이 묻어난다. 하지만 신발만 찍고 다니니 사진 속 주인공들의 표정을 통 알 수 없다. 왜 이런 사진을 찍게 된 것일까

박애란과 후통 꼬마들


신발 사진만 찍는 이유는 무엇인가
-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다. 내 관심사는 베이징의 후통(뒷골목)이고 5년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던 최근 새로운 접근법을 발견했다. 피사체의 표정이 직접 드러나는 것보다 그 주변 소품을 통해서 피사체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꼈다. 리어카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노동자들의 발만 찍어보았다. 표정까지 다 보여주면 감상의 폭이 얕아지는 감이 있었다. 피사체의 표정을 철저히 숨긴 채 신발이나 발, 다리 등만 보여주니 재밌는 일들이 생겼다. 우선 중국 특유의 패션 감각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베이징 사람들의 재치까지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후 신발만 찍는 작업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계속 베이징 사람들의 뒤꿈치를 따라다니고 있다.

주로 어떤 곳을 걸어 다니나
- 몇 년 전만 해도 집 근처 골목들을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외곽까지 나가야 한다. 올림픽을 하면서 시내 골목들을 모두 재개발했기 때문이다. 외곽으로 나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한달에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 하는 쪽방에서 하층민들이 살아간다. 가난한 풍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편안한 향수 같은 것이 스며있다. 물론 슬픈 사연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의 골목이나 대문, 시장, 어물전 등을 돌아다닌다.

장화를 바라보는 물고기


출사 포인트는
- 피사체가 말을 걸 때까지 무작정 걷는다. 그러다가 기회가 오면 집중해서 촬영한다. 오늘과 내일의 공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치면 끝장이다. 남들은 하루에도 수백 장씩 찍는다는데 나는 애를 써보지만 열장도 못 건진다. 그래도 느낌이 오면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얼마 전 어시장에서 생선과 마주하고 있는 장화를 보고 카메라를 꺼냈다. 그런데 어부와 상인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그 순간을 놓치기 싫어서 일단 찍었다. 다 찍고 나서 그들의 얼굴을 보니 무서웠다. 다행히 얼굴은 찍지 않았다고 확인시켜주니 그냥 보내주더라. 어떤 날에는 오브제가 보인다 싶으면 스토커처럼 따라붙는다. 며칠 전에 흰 부츠를 신은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어서 몇 시간이고 뒤를 밟았다. 꽃무늬 바지를 입고 흰 부츠를 신은 모양이 독특했다. 흔히 몸빼라고 하는 그 바지는 도저히 부츠와 매치가 안 되는데 그것도 흰색 부츠를 신었으니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결국 반나절 걸려 좋은 구도를 잡았다.

베이징 생활은 힘들지 않나
-후통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환율이 갑자기 오르는 바람에 한동안 당황했다. 결국 보금자리를 옮겼다. 비용을 아끼려고 여행 가방에 짐을 싣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옮겼다. 하루에 3번씩 사흘을 날랐다. 남이 버린 책장을 주워다 쓰고 있는데 그것도 옮기는 비용을 아끼려고 룸메이트와 등에 지고 날랐다. 때로는 다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베이징에서의 작업이 만족스럽게 끝날 때까지 버틸 생각이다. 톨스토이가 예술가를 두고 ‘허울 좋은 거지’라고 표현했다는데 요즘 그 말에 크게 공감한다(웃음).

꽃몸빼와 부츠


앞으로 전시 계획은
- 전시 제안은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다. 지금은 6월에 있을 전시를 준비 중이다. 베이징주재 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 초대받았다. 지난해 여러 사진전에서 주목받은 이후 규모 있는 단체에서 초청장이 종종 날아온다. 베이징이나 국내 초청은 비교적 참석하기 쉽지만 국제규모 전시는 개인경비가 없어서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예대 사진학과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을 보면 비싼 카메라도 척척 협찬 받던데 부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나를 알아줄 거라 믿는다.

글/워크홀릭 담당기자 최경애 doongj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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