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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고마운 동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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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정 전 장관의 고민도 이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민주당 해체와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자 집권여당의 대선후보가 겨우 지역구를 기웃거려야 하는 궁색함, 그러나 10년 집권의 경륜을 잃고 인물결핍증에 시달리는 민주당을 회생시킨다는 정치적 야망을 수십 번 저울질했을 것이다. 장수의 귀환에는 때가 중요하다. 자주 떠났다가 자주 돌아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재타도와 환란위기라는 호재를 활용했다. 대권 도전에 두 번 실패하고 돌아온 이회창 대표는 ‘순신불사(舜臣不死)’를 외쳤다. 충무공의 불멸 스토리가 귀환의 기회주의성을 덮었다.

기회를 엿보는 장수는 여럿이다. 춘천 우거에 6개월째 칩거 중인 손학규, 미국·중국에서 시시때때로 귀국을 타진하는 이재오, 원로급 정치인으로 옹립되기를 바라는 박희태·김덕룡이 한결같은 마음일 터지만, 이렇다 할 명분도 없고, 화려한 복귀를 보장해 줄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를 엿보는 마당에 유독 정동영만 마음이 부산하다. 민주당이 귀환을 합창하는 것도 아니고, ‘훼손된 민주주의를 치유함’이라는 출마 격문이 ‘순신불사’나 ‘환란극복’만큼 근사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말이다.

리더십과 업적 빈곤, 국민의 환심을 살 만한 정책 메뉴의 고갈에 시달리는 한나라당엔 정동영의 출마가 웬 호재인가 싶을 것이다. 4·29 재·보선이 본격적인 정권 심판은 아니더라도 현 정권의 삼무(三無) 행보를 질책할 만한 계기 정도는 될 터에, 정치판의 화두를 살짝 바꿔놓는 돌출적 사건에 희색이 만연하다. 무매력, 무철학, 무실력-섭섭하겠지만 필자는 지난 1년 치적을 이렇게 요약한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가’ ‘어떤 이론으로 무장했는가’ ‘정국을 잘 끌고 가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집권세력은 한 손에 ‘시장’, 다른 손엔 ‘경제’를 들고 화염에 휩싸인 긴 터널을 황망히 걸어왔을 뿐이다.

집권당은 지난 1년 불(火)과의 싸움으로 얼이 빠진 상태였다. 태안 참사와 남대문 화재로 시작된 실화(失火)가 촛불시위, 금융사태, 용산참사로 이어지고 급기야 국회 난투극으로 번져도 답은 한결같이 ‘시장’이고 ‘경제’였다. 130여 명에 달하는 집권당 초·재선 의원들에게 걸었던 기대는 실종됐다. 너무 점잖고 너무 순종적인, 이렇게 무르고 맹한 초선집단은 처음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노련한 정치를 기대하기엔 중진그룹의 때이른 노환이 깊다. 보수정권이라면 레이건과 대처 정도는 아니라도 현실에 허우적대는 것을 넘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확신하는 경로는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경제 살리기’는 어떤 정권에든 기본책무다. ‘시장으로 구제할 수 없는 것들’을 구제하고, ‘경제로 살려낼 수 없는 것들’을 살려내는 것에서 정권의 진짜 정체성과 진짜 실력이 나온다. 그런데 경제는 바닥이고, 불평등·인권·평화·복지는 내쳐졌고, 행복과 품격에 관한 철학적 설계는 경제담론에 밀려 유배 중이다. 민주당이 이 점을 파고든다면 4·29 재·보선은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응징선거’가 ‘귀환선거’로 바뀌자 민주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고 한나라당은 한결 부담을 덜었다는 표정이다. 집권세력은 뜻밖에 가뿐해진 마음으로 이렇게 외치고 싶다. “고마운 동영씨!” 행여 그렇다면, 그 택시기사나 뭇 유권자들은 싸늘하고 냉정하게, 아주 정이 똑 떨어질 정도로 쏘아붙일지 모른다. “너나 잘 하세요!”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