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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특집]작가정신…감독들의 의식과 패기, 문제는 상상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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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올해 부산영화제를 둘러본 한국의 젊은 감독들은 묘한 당혹감을 맛보아야 했다.

적어도 아시아권에 국한해 본다면 한국의 영화제작 환경은 더 나으면 나았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못할 게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걸핏하면 한국영화의 부실함을 외부여건 탓으로만 돌려왔던 관성이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다는 걸 절감해야 했다.

'검열' 이라는 제약이 오히려 새로운 영화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역설은 최근 일련의 이란영화들에서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대만.홍콩.일본의 젊은 감독들이 자국 상황에 대해 내뱉는 자조적이고 탄식어린 목소리는 그동안 한국감독들의 불평, 불만이 엄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새로운 물결' 부문에 '가면초인' 을 출품한 대만의 아더 츄 감독은 '지금 대만에는 창작활동을 지원해주는 사람들은 없다.

대만의 돈 있는 사람들은 홍콩이나 할리우드 영화와 합작을 하지 대만영화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신인들이 데뷔하기가 힘들고 흥행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며 절망감을 나타냈다.

같은 나라의 차이밍량 감독은 '하류' 에 대한 관객들의 열띤 반응에 상기되어 '한국관객들은 영화인들을 마음에서 우러나 존경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며 자국에서의 냉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우 6천만원으로 '메이드 인 홍콩' 이라는 수작을 만들어낸 프루트 찬감독도 80년대와 같은 뉴 웨이브는 홍콩에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계 예닐곱번째에 속하는 할리우드영화 시장, 올해 다소 줄긴 했지만 연70편 전후의 자국영화를 생산하는 능력을 가진데다 그 중의 절반이상은 신인들의 데뷔작이 차지하고, 입만 열면 영상을 화제로 떠올리는 관객들의 열의, 전국의 20개가 넘는 영화학과에서 배출되는 영화인력등 한국영화계의 외형은 화려하다.

그래서 유복한 환경이 오히려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을 저하시키는 게 아니냐는 아이러니컬한 주장이 사실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다시 아더 츄감독의 얘기다.

'대만의 영화계는 흥행에 대한 야심이 없다.

시장이 없으니까 장사가 잘 돼야 한다는 압력이 없는 것이다.

시장이 없어 제작비를 줄여야하는 나쁜 환경이지만 대신 감독은 자기 상상력과 생각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다' .적은 예산으로 갖은 방식을 끌어들여 머리를 짜다보니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스타일과 양식을 구할 수 있었다는 고백은 분명 음미해 볼 부분이다.

그럼 한국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한국의 영화산업이 괴멸되기를 팔짱끼고 기다려야한 하는가.

물론 당치않은 얘기다.

그러나 감독들의 문제의식과 패기가 중요한 타개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진다.

감독 데뷔를 준비중인 A씨 (34) .그는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지 4년째 되지만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제작자를 여지껏 만나지 못했다.

대학시절부터 시나리오를 써왔고 충무로에 들어와서는 시나리오로 굵직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제작자들이나 기획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뭔지를 잘 안다.

그들은 '강렬한 드라마' 를 요구한다.

그건 대개 저급한 코미디나 섹스물을 원한다는 뜻이다.

감독에 입문하기 위해 타협할 수도 있으나 그 순간 작가정신은 증발해 버린다.

일회용품처럼 취급되는 최근의 신인감독들의 처지가 이를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면서 “기본적으로 영화는 제작비가 미학을 결정하는 예술이다.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거기에 맞는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관객도 끌고 적당히 예술적으로도 포장해보겠다는 욕심이 어설픈 영화로 나타나는 경우를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수 밖에 당분간은 다른 길이 없다.

감독들 스스로 분발하고 타개해 나가는 외에 묘책이 없어 보인다” 고 답답해했다.

영화를 생업으로 삼은 입장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을 만든 배용균감독처럼 한작품에 8년씩이나 매달릴 수는 없겠지만 그 끈기와 근성은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가 월드컵축구 대표팀처럼 투지와 정신력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한국 감독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현실적인 여건 내에서 상상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일이다.

창작의 비밀은 심원해서 이래라 저래라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창작비밀을 묻는 질문에 기타노 다케시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많이 봄으로써 영화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하면 그런 영화이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요즘 젊은 감독들에게는 영화이외의 소양들이 너무 부족하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조차도 제대로 찾아서 보지않는 한국의 많은 감독들에게는 과분한 주문일 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기타노 다케시나 차이밍량감독 같은 이들이 뛰어난 작가이긴 하나 결코 우리나라에서는 나올 수 없는 특출한 천재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자신감과 개인적 노력이 어울릴 때 '코리언 뉴 웨이브' 는 예기치 않게 찾아올 것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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