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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들어찬 지하철에서 ‘희망’ 찾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 판매상, 이른바 ‘기아바이’가 그들이다. 답답한 지하철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기아바이 세계를 동행 취재했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묵직한 가방을 든 중년 남자가 들어선다. 그는 물건을 몇 개 꺼내 들고 이렇게 외친다. “승객 여러분,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불황 탈출구 ‘기아바이’ … 마진 높지만 초보자는 허탕 치기 일쑤”
지하철 판매상 ‘기아바이’의 숨겨진 세계

경기가 어려운 이때 적은 돈으로 양질의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본 제품은….” 지하철 행상, 이른바 ‘기아바이’의 모습이다.

기아바이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굶주림이라는 뜻의 ‘기아(飢餓)’와 판매상 ‘바이(Buy)’의 합성어라는 것과 전동차 주요 부품인 기아(Gear)와 바이(Buy)를 섞었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지독한 경기 불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기아바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첫 번째가 유래는 아닐까? 기아바이 경력 8년차 정영철(가명·42)씨를 만난 곳은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허름한 유통 사무실. ‘○○유통상사’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눈에도 바빠 보이는 중년의 사장과 여직원이 휴대전화 통화에 열중하고 있다.

사무실은 대략 90㎡. 이 중 절반은 지하철에서 판매될 갖가지 상품이 차지하고 있다. 종류는 다양했다. 구두약·칫솔·반창고 등 생활용품부터 건강양말·캐릭터 열쇠고리·하수구 뚫이 기구 등 각종 아이디어 상품까지…. 이 사무실의 L사장은 “새로 온 사람도 물건을 팔 수 있다”며 필자에게 “오늘부터 팔아보겠느냐”고 권유했다.

기아바이 정씨와의 동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씨가 판매를 시작한 곳은 1·4호선을 환승할 수 있는 금정역. 이곳은 기아바이의 남부지역 집결지라고 한다. 여기서 구로동·수원·안산 방면으로 흩어진다. 정씨가 이날 들고 나간 물건은 개당 3000원짜리 우산과 우비. 오전에 예보에도 없는 폭우가 쏟아졌는데,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을 공략하기 위한 반짝 상품이었다.

불황으로 여성 기아바이 증가

정씨의 선택은 적중했다. 지하철에 올라 판매 멘트를 하기 무섭게 우산, 우비가 불티나게 팔렸다. 정씨가 가져온 상품은 50여 개였는데, 정해진 지하철역 구간을 두 번 왕복(1시간30분 거리)하자 동이 났다. 90여 분 만에 15만원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30분당 5만원꼴이다. “기아바이 장사는 타이밍 싸움이에요. 오늘처럼 조금만 늦으면 한 개도 팔 수 없죠. 비가 그치고 우산, 우비를 팔면 무엇 합니까? 시간을 잘 맞춰야 많이 팔 수 있습니다.” 기아바이 세계에도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마케팅뿐 아니다. 기아바이 업계엔 나름의 상권도 있다. 힘있는 기아바이 유통 사무실은 물건이 가장 잘 팔리는 1호선, 2호선 등 시내구간을 장악하고 있다. 자칫 신생 유통업체가 이들 영역을 침범했다간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루 목표량을 달성했지만 정씨는 쉴 생각이 없다.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가 오후에 팔 물건을 골랐다. 이번에 정씨가 선택한 상품은 ‘하수구 뚫이 기구’. 이것은 정씨가 가장 잘 파는 것이다. 그는 “기아바이마다 전공(?)으로 파는 물건이 있다”고 했다. 오후엔 같은 사무실의 40대 주부 최숙례(가명)씨도 동행했다. 중학생 딸 2명을 홀로 키우는 최씨는 아직 초보다.

기아바이로 나선 지 2주밖에 안 됐다. 얼마 전까지 식당에서 서빙을 했는데,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기아바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베테랑 기아바이 정씨와 달리, 최씨는 구두약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오전에 내린 비 때문에 구두약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부끄러움으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최씨의 하소연이다.

기아바이도 양극화 극심

“며칠 지나면 부끄러움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쉽지 않네요. 아직도 승객 앞에 서면 울렁증 때문인지 모기 목소리가 나와요. 행여 아는 사람 만날까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겠어요.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저녁에는 아이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기아바이를 택했는데….” 최씨가 이날 번 돈은 1만원 안팎. 베테랑 기아바이와 초보의 차이는 이처럼 크다.

불황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기아바이의 요즘 삶도 녹록지 않다. 승객의 주머니가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환율 영향도 있다. 승객을 유혹할 만한 아이디어 상품은 대개 중국 공장에서 들여오는데, 최근 원화가치 하락으로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럼에도 기아바이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다.

왜 일까? 불황으로 가계가 어려워지고, 취업문이 더욱 좁아지자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아바이 업계에 젊은이와 주부가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아바이가 되려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또 있다. ‘기아바이만 되면 많은 돈을 손쉽게 벌 수 있다’는 속설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완전히 딴판이다. 이곳도 능력에 따라 돈벌이 수준이 다르다. 이른바 ‘단가를 잘 치는(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행위를 상징하는 은어)’ 기아바이는 하루 10만원 이상을 호주머니에 챙길 수 있지만 만원을 벌지 못하는 사람도 허다하다. 1시간30분 만에 10여만원을 버는 정씨와 구두약을 1만원어치도 팔지 못한 주부 최씨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하철 내 판매행위는 엄연한 불법행위다. 기아바이에게 해당되는 죄목은 경범죄처벌법·철도법 위반 등 다양하다. 최근 일부 단속요원이 과태료 대신 ‘질서요청서 작성’으로 마무리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걸리면 그날 일당을 모두 날릴 위험이 크다. 예전엔 그나마 황금시간대라도 있었다.

단속이 뜸한 점심시간을 이용하면 많은 물건을 팔 수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단속요원들이 이 시간대를 간파해 불시에 단속하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기아바이들. 바로 이들이 사회안전망이 절실한 저소득층의 자화상은 아닐까?

마진율 높지만 범칙금 부담도 커

기아바이의 마진은?

기아바이의 수익률은 어느 정도일까? 항간에 나도는 4(기아바이):1(사무실 유통마진):5(원가)의 원칙은 사실일까? 현지 취재 결과, 기아바이들은 대개 50% 정도의 마진을 챙기고 있다. 예를 들어 1000원짜리 구두약을 팔면 450원, 1000원짜리 반창고세트를 팔면 500원이 기아바이 몫이다.

반짝 상품의 마진율은 더욱 높다. 황사철에 반짝 상품으로 등장하는 황사마스크의 경우, 마진율이 60%에 달한다. 장갑·우산·건강특수상품 등 3000원짜리 물건도 마진율은 비슷하다. 3000원짜리 우산을 팔면 기아바이 몫으로 1400원가량 떨어진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건강 관련 아이디어 상품들은 물건에 따라 최대 1600~1700원까지 기아바이 몫으로 떨어진다.

기아바이 유통 사무실 관계자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마진을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진율이 높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건당 상당액의 마진을 챙기는 대신 판매행위에 따른 범칙금 및 기타 잡비는 개인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아바이 행위는 불법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유두진 자유기고가·tttfocu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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