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오케스트라는 어디로] 1.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죽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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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세계의 유수 오케스트라들이 잇따른 파업과 경영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정부나 기업에서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면서 오케스트라의 지원에 발을 빼려는 추세다.

구미 선진국의 경우 클래식 인구의 고령화 추세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미래의 청중인 청소년들을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끌어들일 묘책은 없는가.

이 문제는 국내 오케스트라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달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97 클래식콤' 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됐던 오케스트라의 위기와 그 대책을 4회에 걸쳐 심층 취재보도한다. <편집자>

오케스트라는 19세기 음악의 잔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21세기를 열어가는 무한한 음악적 창조력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인가.

올해초 애틀랜타 심포니.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샌프란시스코 심포니등 미국 유수의 3개 오케스트라가 두달이 넘게 파업사태를 겪었다.

지난 77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5주동안 파업한지 20년만의 일이다.

이번 파업의 쟁점은 단순히 임금과 연습시간에 대한 불만에서 그치는게 아니다.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는 경영진과 단원들간의 근본적인 시각차에서 기인한 것이라는게 지난달 함부르크에서 열린 97클래식콤에서 만난 어네스트 플레이쉬만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부사장 겸 총감독.72.사진) 의 설명이다.

'미국과 기타 국가에서의 오케스트라의 상황' 이라는 주제발표를 한 그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경제적 어려움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며 "오히려 관습과 타성에 젖어 있는 오케스트라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비롯된 일" 이라고 말했다.

국가나 시당국의 재정지원이 탄탄한 독일의 교향악단에 비해 미국의 오케스트라는 불경기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베를린필의 경우 연간 6주동안 휴가를 즐기지만 미국 교향악단은 여름휴가도 해외공연으로 보낼 때가 더 많다.

교향악단의 연간예산에서 티켓 판매액이 차지하는 비율도 독일은 20%인데 반해 미국은 40%에 이른다.

스웨덴 출신의 신예지휘자 에사 페카 살로넨을 상임지휘자로 영입한 로스앤젤레스필은 최근 영화 사운드트랙 녹음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함으로써 로스앤젤레스 '필름하모닉 (Filmharmonic)'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플레이쉬만은 지난 69년 음악잡지 '하이 피델리티' 에 기고한 '누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야 하나' 라는 제목의 글에서 흔들리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문제점을 꼬집은 적이 있다.

당시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글에서 그는 가방하나 달랑 들고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지휘자를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지휘자의 가방 안에는 5~6개의 악보밖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오케스트라 수가 많다보니 5~6개의 프로그램 만으로도 얼마든지 지휘자로 행세할 수 있다.

문제는 1년에 여섯개 프로그램 밖에 없는 지휘자가 음악감독이 되려고 한다는 것. 플레이쉬만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갈 초특급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87년 클리블랜드 음악원 초청 강연에서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죽었다.

연주자 공동체 만세!' 라는 제목의 '선언문' 을 낭독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케스트라를 되살리려면 오케스트라가 이미 죽어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매일 뻔한 레퍼토리에다 점점 나이들어가는 청중들, 아무런 의욕도 없이 좌절감에 빠져 있는 단원들…. 플레이쉬만의 처방은 매우 급진적이다.

오케스트라를 해체하고 음악가 공동체를 형성해 시민들의 음악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편성의 유연성을 꾀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글이 독일 디 벨트지에 게재된 후 영국예술평의회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 대신 청중 교육 프로그램에 한해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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