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민중시인 이원규·오봉옥 서정 짙은 시집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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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이장 (移葬) 하듯 마음의 뼈를 추리다보니 꽃의 이마가 따뜻하다.

…몸을 줄이고 인연을 줄여 한송이 국화꽃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공기와 물과 흙과 빛만을 탐할 뿐 굳이 일초직입 (一超直入) 의 세계에 매달리지는 않겠다.

" "생각이 좀 바뀌었다.

지면서 이기는 슬기, 버리면서 얻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의연하게 폭을 넓혀가고 싶다.

" 젊은 시인 이원규씨는 "일초직입의 극단적.혁명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겠다" , 오봉옥씨는 "생각이 바뀌었다" 며 잇달아 시집을 펴냈다.

84년 '월간문학' 으로 등단한 이씨는 '돌아보면 그가 있다' , 85년 창비 '16인 신작시집' 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오씨는 '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를 최근 창작과비평사.실천문학사에서 각각 펴냈다.

민중시가 활화산 같이 폭발해 오르던 80년대 중반 시단에 나온 이씨와 오씨는 각기 그들의 대표시집인 '빨치산 편지' , '붉은 산 검은 피' 등 시집 제목에서 선명히 부각되듯 급진적 민중시의 최전선에 섰었다.

그런 그들이 지난 연대 혁명을 향한 붉은 마음을 이번 시집에서는 서정으로 돌리고 있다.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뜨렸다/한 때는 자랑이었다/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 불러모아/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이제 내가 부른 꽃들/모두 졌다//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꽁꽁 얼어붙은/내 몸의 수만 개 이파리들/누가 와서 불러도/죽다가도 살아나는 내 안의 생기가/무섭게 흔들어도/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 오씨의 시 '꽃' 전문이다.

이 시를 읽는 마음은 시인 만큼이나 비감하면서도 아프다.

때늦은 깨달음 때문에 아플수도, 정반대로 혁명의 좌절 때문에 비감할 수도 있다.

이 시에서의 아픔은 그 양극을 다 껴안는다.

시인의 진솔한 목소리와 서정적 자세 때문에. 80년대 선전.선동을 위한 이념과 전투적 시어들은 이제 '꽃' 이라는 구체적 서정으로 바뀌고 있다.

"노을이 된 그대가/붉은 꽃모양을 하고/죄진 듯이 고개 수그린 오늘/툭 건들면/상처뿐인 가슴 다 내놓고/훌쩍, 후울쩍거릴 듯한 오늘" '그대' 연작시 '노을' 부분에서 볼 수 있듯 오씨는 이제 순정한 마음과 서정적 자세로 노을.갈매기.별.새.풀잎 등과 연애하고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주며 삼라만상과 통정 (通情) 하고 있는 것이다.

"숲 속에 홀로 누운 밤이면/나의 온 몸은 나침반/그대 향해 파르르 떠는 바늘/밤새 외눈의 그대 깜빡일 때마다/나의 몸은 팽그르르 돌아/정신이 없다/극과 극의 사랑이여/단 하룻밤만이라도/두꺼비집을 내리고 싶다" 이씨의 시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맨 앞에 오른 시 '북극성' 전문이다.

밤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누여도 북극성은 혁명처럼 반짝인다.

모든 걸 다 버리자고, 지난날 변혁을 향한 외골수 열정을 삭이자고 들어온 몸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제 북극성과 육체, 현실과 이상의 운명적 모순을 깨닫고 그 극을 모두 껴안고 사랑하고 싶다는 이 시를 권두시로 올리며 이씨는 겸허한 시인으로 내려와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진정 사랑하기를 꿈꾸고 있다.

이같이 이제 30중반에 이르러 80년대 20대의 급진적인 젊은 시혼, 그 1백%의 순수가 서정성을 향해 익어가고 있다.

아니 아직 서정의 습득 단계인줄은 모르겠으나 이들이 한껏 익어 그야말로 '쉽게 시를 피워내지 않는다면'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올곧은 깃대 하나 세울수 있을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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