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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600년 … 조선 초 의녀에서 유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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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 양반이… 저 양반이…” 하며 시비를 다툴 만큼 양반의 권위가 실추된 일제 강점기에 ‘상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된 기생의 민중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기생들은 ‘누구라도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장 밑의 꽃’, 노류장화(路柳墻花)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남성 지배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질곡 아래에서도 그네들은 남녀 동권 운동의 선구로, 나아가 대중문화 건설의 주체로 우뚝 섰다.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에 수원·해주·진주·통영의 기생들이 앞장서 참여했으며, 1930년대 카페의 여급으로 진화한 기생의 후예들은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의 꿈을 불 지핀 ‘불령선인(不逞鮮人)’이자 ‘불령스타’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장한(長恨)’(1928)이란 기생들의 잡지 창간호에 실린 ‘첫소리’란 글에서 기생 김채봉은 “우리도 눈을 떴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우리도 사회적으로 평등적으로 살아 보겠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쳤다. 기생 오은희·최옥진·박금도는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바 ‘멕시코’의 여급 김은희, 그리고 영화배우 오도실·최선화와 연명으로 ‘일본 제국의 온갖 판도와 아시아의 문명도시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댄스홀’을 서울에도 허용할 것을 촉구하는 ‘경성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글을 ‘삼천리’(1937)에 기고했다. 이제 기생들은 더 이상 ‘말귀를 알아듣는 꽃(解語花)’이 아니라 대중문화를 이끄는 당당한 주체로 거듭났다. 그렇다고 해도 오른손에 술대를 쥐고 거문고를 타는 홍의녹상(紅衣綠裳) 어린 기녀 좌우에 벌여 앉은 동기(童妓)들의 눈매가 처연하다 못해 애처롭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발행된 우편엽서에 실린 사진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