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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금융 불안 ‘모호성’에서 ‘불확실성’으로 가는 단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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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다. 세계경제의 흐름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 변화한다. 어제의 비관적 예상치가 오늘의 낙관적 예상치가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L자형이니, U자형이니 하며 여러 시나리오들이 거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전망하려면 무엇보다 실물경제 침체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금융위기를 일으킨 장본인인 대형 부실 금융회사들의 처리 문제가 가장 중요한 변수다. 지금까지 대형 금융회사의 부실은 모기지 회사에서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을 거쳐 상업은행(Commercial Bank)으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제는 부실이 정부로 이전되는 국면까지 와 있다. 이번 금융위기는 주로 선진국 금융회사들의 대규모 투자실패에서 비롯됐다. 투자실패는 대출 부실이 아니라 주택금융을 중심으로 한 파생금융상품 투자에서 대규모로 발생했다. 따라서 모기지 관련 금융사들과 파생상품을 많이 취급한 투자은행에서 부실이 집중 발생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1차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기지 회사와 투자은행이 대폭 정리됐다. 이 과정에서 수십 년 동안 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한 세계 5대 투자은행들이 제물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투자은행들이 사라졌건만 부실은 사라지지 않고 상업은행으로 전가되었다는 점이다. 투자은행들이 상업은행에 인수되거나 상업은행으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금융위기가 해결되려면 투자은행 부문의 부실을 넘겨받은 상업은행들이 부실을 정리하고 정상화돼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투자은행에서 넘겨받은 부실 때문에 상업은행 자체가 파산의 위험으로 내 몰리면서 작금의 2차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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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설 곳은 정부밖에 없다. 상업은행들의 국유화 수순이 그것이다.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상업은행 국유화 과정이 진행됐고 거부감을 표하던 미국에서도 뒤늦게나마 부득이 국유화를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마디로 민간부문의 부실을 정부 부문이 떠안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에 빗대어 보면 은행들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유화하는 과정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서는 그 과정이 신속하게 이뤄진데 비해 미국에서는 더디다. 결국 정부부문이 부실을 인수해갈 경우 적어도 민간부문의 부실문제는 해결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기대된다. 금융부실이 늘어나더라도 이를 해결해 나가는 속도가 더 빠르게 되면 금융불안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적 질서 아래서 역할 축소를 주문받아왔던 정부부문이 이제 역할확대를 주문받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최근까지 각국 정부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미국의 경우 리먼브러더스 등의 파산 처리 과정에서 실책을 많이 했고 새로이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도 은행 국유화에 소극적 입장을 취하는 등 기대 이하의 대응을 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자기 나라 문제 해결에 골몰한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의 파산위험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봐왔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재정확대를 통한 적극적인 경기부양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 정부 역할 확대에 대해 여전히 반감이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최근의 2차 위기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제 각국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공멸한다는 위기감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결국 2차 위기를 겪으면서 지금까지보다 정부부문의 역할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앞으로 주요국들이 금융부실 정리와 경기부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금융위기 진정과 불황 완화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세계경제는 완만하나마 반등의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다만 경기가 반등하더라도 그 강도는 미약하고 기간도 길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위기가 진정되고 실물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게 되면 곧바로 금융과 재정의 긴축기조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화된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려면 강력한 재정긴축이 불가피할 것이고, 한없이 내리기만 했던 금리를 다시 올려 유동성을 환수하는 과정이 전개될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때도 비슷한 전례가 있다. 뉴딜 정책으로 대규모 재정지출 확대가 이뤄져 공황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 긴축정책으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불황이 재연되는 양상을 경험했다.


한국경제 상황도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경제흐름을 좌우할 최대 변수는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내 경기부양책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세계 금융불안 상황은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금융시장을 어지럽힐 것이지만 정부부문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불안이 점진적으로 완화돼 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국내 금융시장 불안도 점차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고 환율도 하락세로 반전할 것이다. 실물경제 흐름을 결정하는 데는 추가경정예산 등 경기부양책의 강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민간부문이 자생적으로 수요를 창출할 능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여서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정부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재정부문에서 충분한 추경예산이 편성되어 효과적으로 쓰인다면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올 한 해 한국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은 불가피하겠지만 경기부양책의 규모와 효과에 따라 역성장의 폭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2년 넘게 이어지는 이번 금융 불안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과거 금융불안 경험이 길어야 몇 달 정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장기간의 금융 불안 과정에서 현 국면을 판단해 보면 전반적으로 ‘불확실성(uncertainty)’은 여전한 가운데 ‘모호성(ambiguity)’은 많이 줄어들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잘 모르지만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경우’를 불확실성의 상태로 정의한다면 모호성의 상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지난해 10월 이전 1차 금융위기가 진행될 때는 왜 금융위기가 심화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호성이 극에 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지금은 적어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당부분 파악한 셈이다.

이런 차이는 금융위기에 직면한 기업들의 대응전략에 큰 의미를 갖는다. 모호함이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리스크 관리를 잘 하려 해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리스크를 관리하려면 최소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정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때는 무조건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경영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리스크를 관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일을 벌일 수 없다. 하지만 ‘모호한’ 상황이 ‘불확실한’ 상황으로 바뀔 때는 기업들도 보수적 경영만을 능사로 여길 수는 없다. 이런 때는 위기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리스크를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리스크를 관리해 가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이 가능해진다. 아마도 금융불안의 전체 국면에서 본다면 지금이 모호성의 단계에서 불확실성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한다. 지금까지는 기업들이 위기상황을 맞아 보수적으로 위험를 회피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되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기간이었다면 앞으로는 위기관리뿐만 아니라 경쟁자에 뒤쳐지지 않게 새로운 기회까지 찾아야 하는 훨씬 분주한(?) 시기가 될 것이다. 물론 그 기회를 잡는 기업은 새로운 질서 하에서 주도세력으로 커갈 것이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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