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301조 흥분하면 손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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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통령 후보들을 비롯해 대미 (對美) 협상을 맡았던 정부관료.소비자들까지 미국이 어떻게 슈퍼 301조를 발동할 수 있느냐며 흥분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올해도 막대한 대미적자를 보고 있는 나라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다고 느끼는데 있다.

자동차노조나 시민단체가 연일 항의시위를 하고 국회에서도 결의문을 채택해 세계무역기구 (WTO)에 제소하겠다는 정부방침을 지지하고 나섰다.

모처럼 온 나라가 외세의 공격에 힘을 합쳐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처럼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을 위해 단합하는 모습이다.

아직 우리는 미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거의 모든 미디어가 흥분해서 보도하고 협상에 임했던 정부관료가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과 달리 미국측에선 슈퍼 301조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민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촉발시키지 않은 채 워싱턴 내부에서 의회와 행정부간의 패스트 트랙 (행정부의 신속대외협상 처리권한) 을 둘러싼 줄다리기 게임에 한국을 이용했을 뿐이다.

한국이 흥분하는건 미국이 바라는 바다.

WTO에 가져가겠다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우리가 떠들면 미국을 도울뿐이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보복 그 자체가 아니라 한국의 자동차시장이 폐쇄적이란 것을 온 세상에 들춰내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정부 관계자는 협상을 위한 기본자세가 안돼 있다.

미국사회는 우리 같이 일사불란하게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사회가 아니다.

특히 대외정책에 관한한 원칙이 없다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워싱턴이라는 곳은 반은 변호사고 반은 로비스트라는 말이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국과 효과적으로 협상하려면 평소에 돈과 노력을 써서 치밀한 로비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

우리 주장 몇가지와 서류 몇페이지 달랑 들고 미국에 와서 기자에게 입장을 소개하지도 않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무슨 협상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제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할 일은 다음 협상을 준비하는 것인데, 정부 말대로 보복이 있으면 WTO로 간다는 배수진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조치이지 미국의 요구와 우리의 희망을 타협하는 궁극적인 대안은 아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겉으로는 무슨 논리를 들이댄다 해도 결국 한국시장에서의 셰어를 늘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무엇이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와 국익에 도움이 되는 길인지 즉각 토의를 시작해야 한다.

한 외국인이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다 보면 제일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굴러다니는 차의 거의 전부가 한국차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으로 장관들이 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여주는 발상의 전환을 하면 어떨까. 그만큼 일반 국민도 열린 인식을 가져야 한다.

아마도 우리만큼 민족주의적인 기질을 가진 나라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남은 12개월 남짓 동안 협상하면서 해야 할 일은 미국내의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양국간의 경제의존도 추세가 역전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미국측에 주지시키는 일이다.

도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미국이 우리 시장을 필요로 하는 정도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우리가 미국을 필요로 하는 정도는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경우에 없이 힘으로 밀어붙여 보았자 이같은 추세를 가속시키고 이것은 미국의 이해에 도움이 안된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일례로 2000년 들어 차시장이 완전 개방되면 미국차보다 일본차나 유럽차가 과실을 따먹는 우 (愚) 를 범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장현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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