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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에 99번째 작품, 그게 우리 최고의 작품이었으면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연극 ‘청춘 18대 1’이 오른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로비. 늘 그렇듯 작품을 연출한 서재형씨(39)와 작품을 쓴 한아름씨(32)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연출가는 그렇다 쳐도 공연장엔 자주 오지 않는 작가들과 달리 매번 연출가와 손을 맞잡고 극장을 찾는 한 작가의 모습이 신기하다. 유명한 연출-극작 콤비이자 부부인 이들의 금실이 유난히 좋아서일까. 사실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 시작하면 극작가가 할 일은 별로 없다. 작가가 소외되는 공연 중 상황이 껄끄럽기도 하고 비평에도 신경이 쓰인다며 극장에 나오지 않는 작가가 많다.

“이제까지 300회 가까이 저희 작품이 무대에 올랐는데 거의 매번 가서 봤어요. 매진되어 자리가 없을 때는 입구에 보조의자를 놓고 보기까지 했죠. 연습 때도 거의 안 빠져요. 극장의 스태프가 다 놀라요.”

사실 한씨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다. 첫 작품이었던 ‘죽도록 달린다’ 초연 때 어려운 예산에 작가가 직접 매표소를 맡느라 20분가량의 앞부분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제 공연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관람석에서 배우는 귀중한 기회이기도 하고요. 관객이 어디서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우는지, 어떤 부분은 왜 못 보고 넘어가는지….”

무대를 중심으로 공동작업을 하는 연극인들은 유난히 친분이 두텁다. 커플도 많이 탄생한다. 그중에서도 작업 영역이 서로 긴밀하게 얽히는 작가 아내-연출가 남편이라는 조합은 꽤 이상적일 듯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품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는 극작가, 그리고 다른 수십 명 스태프의 이해관계도 조율하며 연출 의도대로 희곡을 수정하려는 연출가 사이의 논쟁은 치열하게 마련이다. 웬만한 궁합이 아니고서야 지속적으로 콤비를 이루는 경우도, 현실에서 커플이 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서씨와 한씨는 2004년부터 5년 동안 5편의 연극을 함께 만들어온 환상의 콤비이자 거의 유일한 연출가-극작가 부부다.

한씨와 서씨가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파리8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25세의 한씨는 탐미적이고 혁신적인 ‘이미지극’이 하고 싶었다. 당시 무용·콘서트 연출, 무대·전시 디자이너 등으로 다방면에서 날리던 서씨는 여기 알맞은 상대였다. 하지만 리얼리즘적 연극을 배워 왔던 서씨는 납득이 쉽지 않았다.

“한 작가가 논문과 동영상 등 ‘공부거리’를 안겨주며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자기 집에 화이트 보드를 설치하고 강의를 하기도 했죠. 그렇게 시작된 작업에서, 작가가 대사를 될 수 있는 한 쳐내고 이미지와 움직임으로 극을 만들자고 주장하면 연출은 관객이 이해 못한다, 대사 한 줄 정도는 뿌려놔야 한다, 는 식으로 이끌며 극을 만들었죠.”

2004년 이렇게 탄생한 연극 ‘죽도록 달린다’는 동아연극상과 문예진흥원 ‘올해의 예술상’ 등을 받으며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2005년 두 번째 작품은 미스터리를 가미한 퓨전 사극 ‘왕세자 실종사건’이었다. 역시 시청각적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낸 연극으로 예술의전당 ‘자유젊은연극시리즈’에서 당선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6년은 이 콤비에게 극적 반전이 여러 차례 일어난 해다. 갈등과 이별, 그리고 재회와 결혼을 한 해에 모두 겪었다. 1월에 세 번째 작품으로 연쇄살인을 소재로 다룬 심리극 ‘릴레이’를 만들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마지막 공연 후 서씨는 한씨를 택시에 태워 보내며 “앞으로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잘 살아라”고 문을 닫았고 한씨는 “네, 잘 살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8월 두 번째 작품이었던 ‘왕세자 실종사건’이 재공연을 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로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배우의 사소한 손짓 하나가 달라진 걸 보고 감기 들린 걸 알아채고, 하루에도 수십 가지 결정을 내리면서 모든 사소한 장비까지 일일이 챙기고… 작가는 말을 다루고 연출은 사람을 다루는구나… 연출이 다뤄야 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작가구나… 했죠.” 그리고 같은 해 12월 뚝딱 결혼까지 했다.

이제 부부는 매일 함께 지내면서 수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논쟁하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간다. 때때로 다른 작가나 연출과도 작업을 하는 왕성한 행보지만, 늘 두세 시간씩은 꼭 짬을 내 새 공동 작품을 의논하고 작업한다. 물론 요즘도 여전히 의견 충돌이 잦다. 그래서일까, 벌써 결혼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연극 이외의 일 때문에 싸운 적은 한번도 없다. 물론 싸울 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살림 완벽주의 남편과 대충주의 아내의 만남이니까. 하지만 수건은 3단으로 접고 간장은 어디 덜어 쓰고 하는 ‘기본적인’ 룰은 지켜주면서, 서로의 책상은 건드리지 않기, 식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 결혼 후 서재형-한아름 콤비가 내놓은 두 작품은 형식적인 면이 돋보였던 이전 세 작품과는 조금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지적인 관객 위주로 작품을 한 편이었죠. 그리고 정서가 없느니 감동이 없느니 하는 비판도 들었어요. 다음 작품들은 정말 눈물·콧물 다 쏟게 만들어 주겠다 결심하고 썼습니다.”

2007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연극 ‘호야(好夜)’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대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극장에서 남녀노소 관객들이 나오는데 사우나한 것처럼 뽀얘져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이런 카타르시스를 뽑아냈구나, 보람을 느꼈죠. 어떻게 하면 울릴 수 있을까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공연 보러 가서 우는 것도 굉장히 즐거운 경험 아니겠어요.”

그리고 2008년 초연된 ‘청춘 18대 1’(3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이 탄생했다. 이제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버린 ‘서재형-한아름 콤비’의 재기가 반짝반짝 빛난다. “우리 같이 99살까지 99번째 작품 하고 싶고, 그 작품이 생애 최고의 공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수영 객원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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