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 사이버]'느낌' 갖고 싶어 '번개'치면 모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9월30일 오후6시 서울강남구 씨네하우스 앞.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영화소년입니다.

" "제 아이디는 stir22k인데요. 반가워요. " 나우누리 영화동호회 '빛그림 시네마' 회원들이다.

이들은 "웰컴 투 돌하우스" 란 영화 시사회를 보기 위해 모였다.

이름하여 '영화보기 번개' 동호회 대표인 방송작가 조은성씨가 이틀전 게시판을 통해 제의한 것이다. 통신상의 '번개' 는 하늘에서 내리치는 그것처럼 동호회원들끼리 급작스럽게 약속을 잡아 갖는 즉석모임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연락하고 만난다는 의미다.

껌벅거리는 모니터 위에서가 아니라 직접 상대의 얼굴을 맞댄다.

그래서 번개는 '오프라인' 모임이라고도 불린다.

한달에 한번쯤 열리는 정기모임, 동호회내 소모임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번개는 다른 오프라인 모임과 달리 사전 준비없이 진행된다.

언제건 누구나 제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금세 친해진다.

오프라인 모임이 처음인 대학 3년생 김지민씨는 "온라인상에서 수차례 만나서 그런지 그렇게 낯설지 않네요" 라고 말한다.

한국PC통신에 근무하는 이대호씨는 한국의 '원조 번개' 라고 주장하는 사람. 그에 의하면 번개의 역사는 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충북 청주에서 파견근무중이었다.

지역 동호회원과 채팅을 즐기던 이씨는 갑자기 상대방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금 해장국집에서 만나자" 고 제의했다. 상대방도 동의했다.

그때가 새벽4시. 남자 둘만 만나니까 영 재미가 없었다.

며칠후 아예 동호회 게시판에 '심야 해장국 번개' 를 쳤다.

반응이 좋았다.

매번 7~8명씩 모였다.

멀리 제천에서 택시를 타고 오는 동호회원까지 있었다.

당시 청주인근의 PC통신 인구라고 해봐야 10여명에 불과했으니 대단한 열의였다.

91년 이후 PC통신이 대중화되면서 번개도 급증했다.

하이텔의 경우 주말에만 1백여회의 번개가 열린다.

동호회가 3백여개, 동호회보다는 작은 모임이 9백여개에 이르니 번개 횟수도 이에 비례한다.

주제도 다양하다.

그저 만나 술 한잔 걸치자는 내용에서부터 문화행사.스포츠 관람, 당구.볼링등 레저 활동, 생일축하.군대환송 등등. 심지어 하이텔 여행동아리는 지난 여름 휴가철 파리 에펠탑 앞에서 번개모임을 갖기도 했다.

이상야릇한 번개도 있다.

일명 '섹번개' .이성을 대화방으로 초청해 질펀한 음담패설을 건넨다.

십중팔구 상대방은 황급히 대화방에서 도망간다.

가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다.

이때 번개를 제의한다.

한시간 후 어디어디 앞에서 빨간 장미를 든 사람을 찾으라고. 그리고는? 상상해 보시길. 번개의 특징중 하나는 기동성이다.

황당한 사례 하나. 지난 7월22일 종로경찰서에는 비상이 걸렸다.

일본의 한국어선 나포에 항의하는 통신동호인들이 이곳에서 번개모임을 갖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경찰은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해 원천봉쇄했다.

이후 통신인들 사이에서는 '번개 = 불법집회' 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번개 횟수도 한동안 줄었다.

결국 경찰이 친목모임이나 문화.체육행사는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번개가 젊은이들끼리 부담없이 만나는 장이 되다 보니 즉석미팅이 이뤄지기도 한다.

통신작가 이지현씨와 정보통신윤리위에 근무하는 한귀희씨는 소위 '번개 부부' . 하이텔 역학동호회원이었던 이들은 후배의 군대환송 번개모임에서 만났다.

그후 통신상에서 수시로 '접속' 하던 중 남자 한씨가 만난지 2개월만에 청혼했다.

이씨도 그의 순수함에 반해 동의했다.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대화. 하지만 거기에는 심경 변화가 드러나는 음성의 고저장단, 미묘한 표정, 독특한 몸짓 같은 것이 없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서만 나오는 따뜻한 그 무엇을 잃고 있음도 물론이다.

그래서 그들은 컴퓨터를 '파워 오프' 하고 사람이 살아 있는 장소로 서둘러 달려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사람 나고 컴퓨터와 온라인 났지, 온라인 있고 사람 났나, 뭘. 문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