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고른 딱 한장의 음반 ⑤·끝 부동산 중개인 김천배씨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6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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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의 교향곡에서 우주 에너지의 확장과 집약 사이의 균형을 느낀다”는 부동산 중개인 김천배(72)씨. 이 작곡가의 교향곡 6번 CD만 40~50장 모았다. 시벨리우스 이외의 19세기 이후 작곡가에 대한 이해 또한 깊고 넓다. [조문규 기자]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김천배(72)씨에게는 특별한 외출복이 있다. 사계절 내내 입는 하얀색 조끼다. 여기에는 주머니가 6개나 달려 있다. 그중 하나에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나머지 주머니에는 CD를 넣는다. 여기에 꽤 비싼 돈을 주고 산 고성능 헤드폰을 챙기면 외출 준비가 끝난다.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거리를 다니면 ‘웬 노인네가…’ 하는 눈으로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 ‘맛이 갔나’ 그러나 봐요, 하하.”

김씨가 사는 집은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오피스텔. 15평 남짓한 방에 사람 누울 자리보다 음반이 차지한 면적이 더 넓다. LP를 CD로 옮기는 장치, 작은 오디오와 음악 감상용 의자까지 들여놓아 발디딜 틈도 찾기 힘들다. 모두 50여 년 동안 모은 음반 3000여 장을 위한 공간이다.

◆‘딱 한 장의 손님’=전라남도 광주에서 자란 그는 10대 초반에 부모님의 음반 소리를 처음 들었다. “바이올린 소품이었던 것 같아요. 유성기를 통해 나오는 음향이 어찌나 환상적이었는지….” 원하는 음악을 바로 들을 수 없는 ‘결핍’이 그를 수집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을 거쳐 겨우 들어온 음반 몇 장, 아니면 교회에나 가야 유행가 아닌 음악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래도 그때 힘들게 들었던 음악이 지금보다 더 ‘맛’이 있었던 것 같아요.”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도둑질만 빼고 다 해봤어요. 신문 배달, 보험 외판원, 영화 판에서도 잡일을 좀 했고….” 20년 전부터 그가 선택한 일이 부동산 중개다. 얼마 전까지 서울 방배동의 한 부동산에서 일했다.

김씨는 이 직업들이 음악 듣기라는 진짜 ‘일’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정리한다. “내가 제대로 배운 것도 없고, 번듯한 직업도 없었지만 음악만큼은 모두를 평등하게 감동시키더라고요.” 빠듯한 수입을 쪼개고 쪼개 그는 한 번에 딱 한 장씩을 구입하는 원칙을 세웠다. 명동의 ‘디아파송’ 등 유명한 옛 음반가게의 주인들은 그를 ‘딱 한 장의 손님’이라고 불렀다. 음반 하나를 다 외울 때가 돼서야 다음 음반 또 한 장을 사러 왔기 때문이다.

◆수술 직후 음반 한 장=이렇게 애지중지한 음반 한 장은 그에게 보답을 했다. 5년 전 암이 퍼졌던 대장과 위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을 때였다. “5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수술을 받던 방이 생각나요.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기가 죽더라고.” 그때 그는 “도살장 들어가는 느낌”을 잊기 위해 음악을 떠올리려 애썼고,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1865~1957)의 교향곡 6번이 생각났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묘사돼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음악을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며 공포를 잊었다. 수술 후에도 병실에서 헤드폰을 끼고 교향곡을 계속해서 듣고 있어 간호사들 사이에서 명물로 통했다고 한다. 지금 그의 방 한켠에는 고향의 숲을 거니는 시벨리우스의 사진 액자가 놓여 있다.

병원을 나선 후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손댔던 사업이 무참히 실패했고, 아내도 떠나보내야 했다. 그가 신중히 모은 3000여 장의 앨범 중 몇 장이 그럴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 러시아 민요, 브루크너 교향곡 등이 사람 대신 김씨 곁을 지켰다. 그가 자신이 누울 자리보다 더 넓은 면적에 음반을 ‘모셔 놓은’ 이유다.

김호정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 김천배씨가 말하는 이 음반
시벨리우스 교향곡 6번 / 파보 베르글룬트(지휘)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EMI

시벨리우스는 북유럽만이 지닌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작곡가다. 특히 교향곡 6번에는 늦가을에서 초겨울의 북유럽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서정이 녹아 있다. 강렬하고 거대한 음향, 놀라운 구조로 청중을 자극하는 음악도 많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정화된 미를 아는 작곡가다. 여름의 뜨거움이 식고 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점이 이 작품에 들어 있다. 완전한 웅크림의 겨울은 아직 오지 않은 때다. 핀란드 태생 지휘자 파보 베르글룬트는 시벨리우스 전문가다. 많은 오케스트라와 이 곡을 녹음했지만 헬싱키 필하모닉과 두 번째 녹음한 1987년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나는 이 음반을 들은 후 그 나라 사람만이 아는 정취가 궁금해졌고, 핀란드 여행까지 떠나게 됐다.

■ ‘외출 동행’ CD 3선(選)

- 러시아 민요 모음집(여러 아티스트, 멜로디아 제작) : 가장 좋은 음악은 사람과 가깝고 비슷한 것. 민요야말로 사람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장르다. ‘스텐카 라친’ ‘이글’ 등 12곡을 뽑은 음반.

- 브루크너 교향곡 9번(오이겐 요훔 지휘, 브릴리언트 클래식스 제작): 너무 완벽하지 않은 지휘에서 인간미가 느껴지는 연주다. 음악의 구조가 간혹 흐트러지지만, 말년 브루크너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작별을 잘 표현해냈다.

- 바흐의 ‘푸가의 기법’(파올로 보르치아니의 4중주단, 모노폴리 제작): 바흐가 연주 형태를 지정해놓지 않은 아리송한 작품. 건반 연주, 색소폰 4중주 등으로 다채롭게 연주되지만 현악 4중주가 가장 좋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보르치아니는 동료들을 모아 자신의 마지막 레코딩으로 이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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