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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무림]2.會昌不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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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무력 (武曆) 97년 아홉번째달. 천하무림의 눈과 귀는 회창객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해 열려 있었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지켜보는 구경꾼의 심정으로. 중추절을 지나면서 회창객의 세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었다.

인제거사의 출사표가 결정타였다.

회창객의 몰락은 무림에 힘의 공백을 가져왔다.

천하무림의 모든 힘이 일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초반식이라도 무공을 익힌 자는 모두 무기를 잡고 나섰다.

대중검자.회창객.조청천.인제거사.종필노사등 다섯 고수들이 너나없이 한 사람의 무림인이라도 더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된 탓이다.

흑 (黑) 과 백 (白) 이 따로 없었다.

여 (與) 와 야 (野) 의 구분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찬종검과 수성객, 흑미제 (黑眉帝) 포철공의 집은 내방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들을 영입하려는 다섯 고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수를 모아라. 모아서 세력을 먼저 이루는 자가 천하를 쥐리라. 이합집산과 눈치보기, 몸값올리기가 곳곳에서 자행됐다.

무공 한줄 익힌 것이 자랑스러운 나날이 계속됐다.

이름 석자를 알만한 고수라면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무림지존좌에 도전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해댔다.

누가 꼴뚜기인지 망둥이인지 구분이 안가는 상황이 계속됐다.

자연 민초들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다.

싸늘한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쏟아졌다.

그러나 권좌욕에 불타는 무림인들의 눈에는 그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 무공9단에게도 묘수는 없다

청와관 집무실. 공삼거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쳇바퀴를 돌듯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벌써 몇시간째다.

뭔가 고민이 있을 때면 나오는 공삼의 버릇이다.

간혹 무언가 중얼거림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법이 없어, 방법이. " 회창객이 무림지존에 등극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50여 성상 (星霜) 동안 재여무림 불패신화가 이어졌고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불패신화는 계속됐다지만 지금은 그런 화려한 전력만 믿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묘수가 없다.

공삼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항간에선 공삼이 인제거사의 손을 들어준다느니, 종필노사의 내각공을 받아들인다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물론 인제거사의 출사표를 막지 못했고 종필노사의 의중을 떠보려고 무림정보부의 책임자를 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삼이 대놓고 인제거사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회창객의 반발로 신한국방은 풍비박산이 날 터였다.

하물며 인제거사는 따져보면 신한국방의 배신자가 아닌가.

강호의 온갖 비난이 공삼에게 쏟아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종필노사와 힘을 합칠 수도 없었다.

'3김청산' 을 밥먹듯 외쳐온 공삼이다.

명분이 없는데다 그나마 남은 명예마저 잃게 될 터였다.

게다가 설령 종필노사와 합친다 해도 재여무림이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게 문제란 말야. 방법이 없어, 방법이. 휴 - ." 공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럴때 내가 대신 출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중검자 따위는 한 칼에 베어버릴 텐데. 그때였다.

조청천이란 이름 석자가 공삼의 뇌리를 번개같이 스친 것은.

◇ 아래가 흔들리면 위가 쓰러진다

술시말 (戌時末 : 밤 9시경) 여의섬에 자리한 신한국방 총단은 적막에 잠겨있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석달도 안남은 천하대전을 준비하는 재여무림의 본산다운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에이, 글렀어. 도대체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야지. 이게 뭐야 도대체. " 염소수염의 중년 사내가 투덜거렸다.

그는 신한국방의 말단 무사였다.

"맞아. 이래서야 어디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겠어?

대중검자에게 무림지존좌를 헌납하는 꼴을 눈뜨고 지켜보게 생겼으니. " 한창 문서를 정리하던 손길을 멈추며 동료 무사가 말을 받았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됐지?

천하의 주인인 우리 신한국방이 말이야. " "다, 그놈의 회창객인지 회창주인인지 때문이지 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더니 원. 주객이 전도돼도 유분수지. 엉뚱한 작자가 굴러들어와 후계자가 되는 바람에 이렇게 된거 아니야. 무림의 무자도 모르는 백면서생이 지휘봉을 잡았으니 방이 잘 굴러갈 턱이 있나. " 그때 문이 열리며 철골한 (鐵骨漢) 삼재검이 들어왔다.

그는 수하들의 입을 다짜고짜 가격했다.

삼장밖으로 고꾸라지는 수하들을 보면서 삼재검은 씩씩거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 대전을 앞두고 싸워 이길 생각은 않고 불평불만부터 해대. 바로 너희 같은 자들 때문에 우리 방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거야. " 삼재검은 가슴이 타는 듯했다.

벌건 숯덩이를 통째로 삼킨 느낌이 이럴까. 위기다.

도와달라. 힘을 합쳐야 한다.

혼자 미친 듯이 동분서주해 보지만 그의 호소는 메아리가 전혀 없었다.

방내에는 우군보다 적들로 득실거리는 듯했다.

지금 그에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수하들의 경우는 오히려 양호한 편이었다.

노골적으로 타도 회창객을 외치는 무리들까지 등장하는 형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강심.강골로 소문나 철골한이라 불리는 삼재검의 입에서도 저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하늘이여. 주군을 버리나이까?

신한국방을 버리나이까?

삼재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이 (李) 로써 이 (李) 를 제압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이젠 회창객을 본격적으로 도와야 할 때입니다." 종찬소검자의 말에 대중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창객이 지금 거꾸러져선 곤란했다.

회창객의 몰락은 인제거사에게로 재여무림의 힘이 집중됨을 의미했다.

그럴 경우 다 잡아 놓은 승리를 놓칠 수도 있었다.

신중, 또 신중해야 했다.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앞서간다고 자만한지 않는 것. 평생을 무림에 몸담아 온 노고수의 신중함이 대중검자에겐 있었다.

"이이제이 (以李制李) , 인제거사와 회창객이 막판까지 팽팽한 싸움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는 뜻인 줄 내 잘 알고있소. 곧 회창객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리다.

" 비록 최근 대중검자가 다른 출전자에 비해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고 있다하나 속사정은 꼭 그렇지 못했다.

대중검자의 세력은 줄곳 3할을 약간 웃도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회창객이 몰락했다지만 재여무림의 세력은 쉽사리 대중검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회창객이 잃은 세력은 대부분 인제거사에게 흘러 들어갔다.

만에 하나, 회창객과 인제거사가 서로 힘을 합하거나 둘중 한사람이 주저앉는 경우가 생긴다면 곤란했다.

최악의 경우 한사람에게 재여무림의 세력이 모일 수 있었다.

대중검자에게 그것은 지난 무림지존 비무대회의 악몽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종필노사와의 합력은 그래서 꼭 이뤄내야 했다.

물론 그것이 세력확장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세력확장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재여무림의 마지막 승부수를 사전에 차단하고 강호백성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큰 명분을 대중검자에게 가져다 줄 터였다.

대중검자가 사랑을 구걸하는 젊은이처럼 종필노사와의 합력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이이제이 (以李制李)에 종필노사와의 합력.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한달만 더 흘러준다면 그땐 공삼이나 회창객은 물론 대라신선 (大羅神仙 : 죽은 자도 살린다는 도교의 신) 이 나타나더라도 끊어진 재여무림의 숨통을 되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지존좌. 그것은 대중검자의 반 발자국 앞에 다가와 있었다.

◇ 두 이씨, 두마음 (李心二心)

인제거사는 느긋했다.

이제 며칠후면 무림에 파천황 (破天荒) 이 있을 것이었다.

회창객의 회생?

흥, 웃기는 소리. 고목에서 싹이 돋기를 바라는 게 낫지. 상황은 끝났다.

사흘뒤 열릴 신한국방 총회는 결집의 장이 아니라 파국의 장이 될 것이었다.

신한국방이 굉음을 내며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찢어진 신한국방의 힘은 고스란히 내게 걸어올 것이었다.

남은 것은 대중검자와의 일전뿐이었다.

그것도 자신있었다.

재여무림의 결집된 힘은 가히 파천세 (破天勢) , 하늘을 깨뜨릴 위력이 있었다.

대중검자와의 결전은 결국 호남무림과 비호남무림의 싸움이자 늙은이와 젊은이의 싸움이 될것이다.

대중검자의 호남검문은 일격에 날아갈 것이다.

대중검자여. 지금은 실컷 즐거워하시오. 그러나 잠시뿐이오. 꿈꾸듯 즐거웠던 당신의 달콤함은 곧 거울이 깨지듯 산산조각 날 것이니. 백성의 마음을 얻는 자, 지존좌에 오르리라. 이것이 바로 인제거사의 믿음이었다.

민초의 마음을 얻으면 세력과 힘은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 그것을 등한시한 자의 말로가 눈앞에 있었다.

바로 회창객이었다.

그는 오만했다.

백성의 눈을 무시했고 백성의 힘을 간과했다.

그 오만이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나 인제거사는 그같은 실수를 결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혹자는 비무결과에 승복하겠다는 14번의 맹세를 어긴 자라며 나를 손가락질하나 그것은 어쩔 수 없다.

큰 일을 이루는 자는 사소한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 법. 게다가 어디 무림인 된 자로 식언하지 않은 자가 있더란 말인가.

식언이 문제라면 수없이 은퇴를 번복한 대중검자가 1등을 차지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천시 (天時)가 내게 있고, 지기 (地氣)가 나와 함께하며 인화 (人和)가 내 손안에 있다.

천지인 (天地人) 의 힘이 내게 있음이니 무엇을 걱정하랴. 시간은 모든 것을 내게 안겨줄 것이다.

같은 시각, 회창객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더 이상 흔들림은 없다.

사흘 뒤 총회가 열리면 태상방주의 자리에 오른다.

그때부터는 한 길로 가리라. 정통무공만으로 승부하리라. 따르는 자에게는 영광이, 거역하는 자에게는 파멸이 있을 것이다.

방내의 이단자들이 정리되면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한달이면 충분하다.

대중검자의 세력을 누르고 실지를 회복하는 데는. 천하무림인들은 내 무공과 실력이 부족해 집안단속도 못한다고 비난하나 그것은 그들의 식견이 부족한 탓. 내가 아닌 다른 자가 후계자가 됐다면 어땠을까?

벌써 신한국방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었다.

그나마 무공과 출신이 제각각인 방내 고수들을 이만큼이나 잡아둘 수 있는 자, 나말고 또 누가 있으랴. 그런 간단한 이치를 모르는 자들이 모든 책임을 내게 뒤집어씌우고 있으니, 원. 방의 분란을 틈탄 대중검자의 득세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내게 반기를 들고 나가 천방지축 날뛰는 인제거사에겐 곧 혹독한 시련이 닥치리라. 새 문파를 세우겠다고? 흥!

어림없는 소리. 한 솥밥을 먹고도 재여무림인의 속성을 그리도 모른단 말인가!

말단 무사는 몰라도 방내 고수들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인제거사에겐 필승의 능력이 없고 내가 이기거나 재야무림이 이기거나 그들에겐 파멸밖에 남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둥지를 떠난 뒤 비바람 속을 헤매봐야 친정의 따뜻함을 알게 되는 법. 백성의 마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를 인제거사는 알게 되리라. 거품이 사라진 뒤 처절한 패배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깨닫게 되리라. 자신이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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