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대쪽본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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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의혹에 “사법감독관인 법원장이 재판 진행에 간섭한 건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일침을 놓고, 검찰이 발표한 용산 사고 수사결과도 “경찰에 책임이 없다는 건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는 결론”이라고 꼬집었다. 국회의장한테도 “의안의 신속 처리를 위한 직권상정 권한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악용해 의장 직분을 욕되게 했다”고 모진 소리 하고, 방송법 개정에 ‘사회적 논의기구’를 도입하기로 한 여야 합의도 “국회의 입법권 행사를 시민단체에 맡기자는 위헌적 발상”이라고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도 국회의장을 윤리위원회에 제소한 민주당 처사를 “입법부 스스로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라 꾸짖고, “용산 사고를 특별검사제나 국정조사 요구를 통해 정치 쟁점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여당은 총대 안 메려 입 닫고, 야당은 딴 속셈으로 입 안 여는 ‘불편한 진실’도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언론사의 방송 소유 금지는 신군부가 자행한 언론통폐합의 유산일 뿐이다.” “조중동이 편파적이라면, 방송의 편파성은 국민 사고와 행동에 그 이상의 문제를 야기해 왔다.” 대통령도, 북한도 그의 날카로운 혀끝을 피해가지 못했다. 대통령이 국회 폭력사태를 “정치 위기”라 언급하자 “미국 대통령은 노상 전화통에 매달려 있다는데, 우리 대통령은 얼마나 국회와 야당을 설득하고 통합 리더십을 발휘했는지 모르겠다”고 혼냈다. 북한 위협에 대해서도 “전쟁을 막는 길은 강력한 대응력뿐”이라며 “평화를 원하지만, 도발하면 확실히 대응해 아주 침묵시켜야 한다”고 말을 잘랐다. 하나같이 똑 부러지고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이처럼 바뀐 모습을 보고 “진작 그랬더라면 벌써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달라진 이유는 뭘까. 흐려졌던 ‘대쪽본색’이 되살아난 건 무슨 까닭에설까. 최근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지휘봉을 잡은 히딩크 감독이 대신 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라운드의 마법사’라는 별명답게 침체에 빠졌던 첼시를 맡자마자 6연승을 구가하는 히딩크 매직을 이어가고 있는 그다. 마법의 비결은 다른 게 아니다. 팀을 맡기 전 관중석에서 게임을 지켜볼 뿐이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벤치에서는 보이지 않던 팀의 문제점과 해법이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바둑 훈수와 같은 이치다.

두 차례나 대표선수로 출전했다가 헛발질했던 이유가 관중석에 앉으니 보이는 것이다. 물론 제3자의 책임 없는 속 편한 발언일 수도 있다. 여론의 흔들림을 좇는 정치적 계산이라 낮춰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국민 눈으론 아무래도 그게 정답이다. 밖에는 말 못할 내부 속사정, 이리저리 얽힌 이해관계가 있다 한들 왜 국민이 그것까지 신경써야 하냔 말이다. 이것 따지고 저것 가리다 내놓은 오답들에 신물 난 지 오래다. 어디 출신, 누구 제자가 아니라 박지성이 정답인 것이다.

 새사람 된 이 총재가 그 마음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세 번째 기회가 오지 말란 법도 없을 터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마음을 경쟁자들과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최고권력을 가졌거나 갖고자 하는 지도자들 말이다. 그들이 한발 물러나 스스로 해온 일들을 돌아볼 수 있다면 백성에게도 홍복(洪福)일 테니 하는 얘기다. 그들에게 『정관정요』가 전하는 당 태종의 말이 도움 되겠다. “현명한 군주는 부족함을 생각해 더 나아지려 하지만, 어리석은 군주는 부족함을 감춤으로써 영원히 어리석어진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