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증권·예치금이 99.7%, 언제든 현금화 가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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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03면

지난주 한국의 외환보유액을 둘러싸고 가벼운 소동이 벌어졌다. 외신들의 ‘한국 때리기’ 보도에 이어 외환보유액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까지 벌어졌다. 논란을 부른 것은 김광수경제연구소가 2일 인터넷 포털에 올린 ‘가용 외환보유액 이미 바닥났다’는 보고서였다.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장부상 수치일 뿐이며, 외화증권자산의 매각이 어렵거나 매각 시 거액의 투자손실이 발생해 실제로 현금화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 안 된다는 게 보고서의 골자였다.

외환보유액 뜯어보기

기획재정부는 펄쩍 뛰었다. 보고서가 실상을 잘 몰랐다는 것이다. 우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바뀐 외환집계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반박했다. 게다가 최근 미국 국채시장 상황도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정부는 1999년 8월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기준에 따라 ‘즉시 현금화할 수 있으며 통화 당국이 관리하는 자산’만을 외환으로 집계하고 있다. 따라서 외환보유액은 모두 ‘가용’이라는 것이다.

외환보유액은 2월 말 기준 2015억 달러인데 국채·기관채 등 유가증권(88%)과 예치금(11.7%)이 대부분이다. 언제든지 현금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외화증권의 장부가가 시가를 밑돈다는 연구소의 주장도 일축했다. 회사채 일부는 손실이 났지만 전체적으로 시가가 장부가를 웃돈다는 것이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해지자 미국 국채 값은 치솟았다.

외환보유액은 현재 2000억 달러 선이다. 예전 IMF 기준(3개월치 경상지급액)으로 보면 충분하고 넘친다. 그러나 이 기준은 외환위기로 외국 자금이 급격히 이탈하는 상황까지 감안한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유동외채(단기외채+1년 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와 외환보유액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의 외환보유액 대비 유동외채 비율이 102%에 달해 17개 신흥시장 가운데 셋째로 위기에 취약하다”고 쓴 것도 그런 잣대다.

외환시장이 불안해지면서 ‘자본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도 나온다. 정부도 강만수 경제팀 시절에 한때 이를 검토했지만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의 자본 통제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결론을 냈다는 후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이한규 박사는 “요즘처럼 국제금융시장의 돈 흐름이 꽉 막힌 상황에서는 외환보유액의 적정성을 따지는 것 자체의 의미가 크지 않다”며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다지고 경제 체질을 튼튼히 하는 정석(定石) 이외에 별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외신이 주목하는 유동외채의 경우 만기연장(롤오버) 비율이 높아 과민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6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2월 현재 외채의 만기연장 비율은 91%를 넘고 있다”며 “대외채무 상환 혹은 만기연장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외환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97년 12월에도 단기외채의 32%가 연장됐다.

은행 대출을 예금으로 나눈 예대율이 높다는 점도 외신의 시빗거리다. 예금 성격이 강한 양도성예금증서(CD)를 예금에 포함하면 예대율이 떨어진다는 게 우리 정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 예대율(100%)도 낮은 편이 못 된다. 예금을 받아 안정적으로 돈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결국 채권 등 시장성 수신에 의존해야 한다. 요즘 같은 신용 경색기에 시장성 수신에 많이 의존하는 은행을 외국 투자자가 어떻게 볼지는 명약관화하다. 은행들의 자산 키우기 출혈경쟁이 가져온 후유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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