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 마사나오 지음, 이애숙·하종문 옮김
삼천리, 1만8000원
조선보다 일찍 개화했고, 그래서 부국강병 뿐 아니라 사상사 측면에서도 우리보다 ‘한수 위’였던 일본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천황을 받들고 서양을 배척하자는 주장) 사상의 시조이자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의 선구자였던 요시다 쇼인, 이광수 같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후쿠자와 유키치, 김교신·함석헌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 등 막부 시대 인물부터 2006년 타계한 와카쓰키 도시카즈까지, 근·현대 인물 50명이 소개돼 있다. 한 사람당 6페이지 가량으로 압축했기에 본격적인 인물론이나 사상사적 논리 전개와는 거리가 멀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상사의 대가가 지은 책답게 고르게 맥을 짚어놓았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한국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들을 만나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근대 일본의 여성해방주의자·인권운동가·환경운동가·반전사상가 등의 생애는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2차 대전 패전 후의 일본이 평화헌법 아래 다양성 넘치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외교평론가 기요사와 기요시(1890~1945)가 2차 세계대전 와중에 몰래 쓴 ‘암흑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영웅은 이제 충분하다. 바라건대 더 이상 ‘육탄(肉彈)’의 미담이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작전을 통해 그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는 방도를 취하지 않았으면 한다.” 기요사와는 엄혹한 전시체제 하에서 군부의 광적인 태도를 일기에서나마 비판하다가 패전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눈을 감았다. 노동의학의 선구자 이시하라 오사무, 농촌의학 제창자 와카쓰키 도시카즈 등의 생애를 대하면 제국주의 시대 일본사회의 이면에는 의외로 선구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비극까지 겹친 탓에 이들은 우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는 조선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스승이나 마찬가지였고, 부라쿠민(일본의 최하층 천민) 해방운동의 지도자 마쓰모토 지이치로는 조선의 형평운동이 본보기로 삼은 인물이었다. 속상하지만, 속상해하기에 앞서 오늘날의 한국 사상계는 식민지 시대에 비해 얼마나 나아지고 풍성해졌는지, 얼마만큼이나 자생력을 갖추었는지를 먼저 되짚어볼 일이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