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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슬로 아키텍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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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슬로 푸드(slow food)는 패스트 푸드(fast food)와 대비되는 말이다. 20여년 전 이탈리아에서 맥도널드 햄버거에 대항해 전통요리를 지키자는 운동에서 생겨났다. 그 후 '슬로'란 수식어는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이 건축과의 결합이다. 바로 '슬로 아키텍처(slow architecture)'다. 말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일본인들이 지어냈다.

말 그대로 건물의 기능성 이외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며 천천히 짓는 건축을 가리킨다. 경제적인 효율에만 치우치지 않고 건축물의 문화적인 성격과 역사성을 중시한다. 또 건축자재도 가급적 지역의 독특한 소재를 사용한다. 인공적인 구조물이라는 위화감을 줄이고 지역문화에 녹아들도록 하자는 것이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페터 줌토는 스위스 산간에서 나는 돌과 나무를 사용해 '천천히' 건물을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온천휴양 시설인 테르메 발스를 6년에 걸쳐 지으면서 주변 환경과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당도 대표적인 슬로 아키텍처로 꼽힌다. 가우디가 손을 댄 이후 아직까지 120년간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야말로 '느린 건축'이지만 이젠 스페인의 문화유산이 돼 버렸다.

일본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명소인 도쿄(東京) 다이칸야마(代官山)의 주상복합 건물인 힐사이드 테라스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슬로 아키텍처다.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마키 후미히코(文彦)가 1967년부터 차근차근 기획해 30여년간 공을 들였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도시 경관을 잘 살려냈다고 인정받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창설한 도시 디자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슬로 아키텍처들은 각 지역에서 문화적 상징을 지닌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전문가들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지역 주민들도 그 의미를 함께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와 한참 거리가 먼 듯하다. 백년대계로 추진해야 할 천도(遷都)조차 무슨 패스트 푸드 메뉴 고르듯 정해버리는 모습이다. 슬로 아키텍처처럼 여유를 갖고 하자는 말은 씨도 안 먹힐 분위기다. 뭐가 그리 급한 것일까.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