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유물 공개한 재일교포 김형익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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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도쿄 미나토구 아오야마 (港區 靑山) 는 고급주택가 사이로 패션숍들이 밀집해있는 곳. 이곳의 작은 맨션에 거주하는 김형익 (金炯益.69) 씨는 언제나 노타이에 청바지 차림이다.

하지만 도쿄 니혼바시 (日本橋) 나 교바시 (京橋) 의 골동거리에서 한국통 (通) 으로 불린다.

金씨가 금동관을 포함한 8백26점의 고분출토 유물을 입수한 것은 21년전. 일본인 유명 컬렉터로부터 이를 인수했다.

이 물건의 존재가 일본내 컬렉터들 사이에 은밀히 알려진 것은 오구라가 죽은 직후인 1964년 무렵. 당시 칸사이 (關西) 실업계의 거물이자 한국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인 컬렉터가 이 물건을 손에 넣었다.

그는 한국 도자기에 대해서는 일본 제일이란 평을 들었는데 금속에까지 손을 뻗친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70년대말 오일쇼크의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사업에 실패하면서 金씨 차지가 되었다.

金씨는 당시에 일본인 컬렉터가 인수한 가격 위에 "한국의 청자와 백자 15점을 더 얹어주었다" 고 했다.

큰 물건을 인수하면 어느 사회든 대컬렉터로서 이름이 난다.

그가 인수한 오구라의 고분유물 덕분에 그의 불교미술품과 도자기도 빛을 발했고 그중 하나인 조선시대 청화백자 매죽문 (梅竹文) 항아리는 국내 컬렉터에 넘겨져 현재 보물 6백59호로 지정돼있다.

金씨가 태어난 곳은 해방전 일본에 건너가 목재업을 하던 부친이 터를 잡았던 일본 야마구치 (山口) 현 오고리 (小群) 시. 국내 고향은 경남 사천이다.

한국전쟁 중에 큐슈 (九州)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 연합군총사령부 (GHQ)에 군속으로 특채돼 근무했다.

고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극히 일부지만 일본으로 피난온 한국인들이 가져온 고미술품들이 헐값에 돌아다닌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컬렉터의 대부분이 파친코로부터 가업을 일으킨 것과 달리 그는 군사문제 컨설턴트라는 특이한 직업을 갖고 있다.

연합군총사령부에서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세지마 류조 (瀨島龍三)가 고문인 일본군사학회의 정회원으로 있으면서 주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군사문제를 컨설팅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중앙일보를 통해 국내에 이들 물건을 공개한데 대해서 "인생의 황혼이 가까울수록 수구초심 (首丘初心) 이란 고향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며 "이 물건들 역시 한국으로 건너갈 인연을 찾아주고 싶다" 라고 공개 이유를 말했다.

그는 이 물건이 한국에서 처분된다면 그것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아 국내에 군사문제연구소를 세우는데 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도쿄 =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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