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달이 없었다면?…하루는 여덟시간,지구는 태풍의 도가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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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만약에 달이 없었다면?

당연히 한가위나 정월 대보름은 없다.

한달, 두달 하는 시간의 단위도 없다.

'신라의 달밤' (현인) 이나 '달의 몰락' (김현철) 같은 노래도 없다.

없는 것 투성이다.

술에 취해 호수에 비친 달을 껴안으려다 불귀의 객이 된 시인 이태백이나 조금 더 오래 살았을까. 그런데 한가위가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은 일단 사람이 있고 나서의 일이다.

달이 없으면 인류가 지구 위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달이 없는 지구가 지금과 크게 다른 것은 세가지다.

첫째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적다.

둘째 하루가 짧다.

셋째 바람이 심하게 분다.

밀물과 썰물은 해와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생긴다.

여기에는 지구에 훨씬 가까이 있는 달의 영향이 크다.

달 없는 지구에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는 지금의 3분의 1정도다.

'하루' 란 지구가 한번 자전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달에 의해 움직이는 조수가 바다 밑바닥과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점점 길어진다.

달이 없어 조수가 약하면 마찰도 약하다.

처음 지구가 생겼을 때 하루는 6시간이었던 것이 45억년이 지난 지금 24시간이 됐다.

과학자들이 계산한 바에 따르면 달이 없는 지구에서 지금의 하루는 8시간이다.

하루가 8시간이라는 것은 지구가 그만큼 빨리 돈다는 얘기다.

빨리 돌면 바람도 세게 분다.

하루가 8시간인 지구에서 시속 3백㎞ 정도의 바람은 흔한 일일 것으로 예측된다.

독립한 뒤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제일 큰 피해를 입힌 59년의 태풍 '사라' 는 최대풍속이 시속 1백30㎞ 였으니 시속 3백㎞는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난 바람이다.

이런 여건들이 달없는 지구를 '사람살기 힘들게' 만든다.

지구의 육상 동물은 바다로부터 올라왔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처음에는 바다동물이 밀물이 닿는 해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기서 조개 등 새롭고 풍부한 먹이를 먹으며 매력을 느끼고는 점점 육지에 맞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이 없는 지구에서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적다.

육상으로 올라오려던 초기 바다동물이 머무를 수 있는 면적이 좁다는 얘기다.

당연히 먹이도 적다.

뭍으로 올라오려던 바다 동물이 그냥 돌아갔음직하다.

어찌어찌해서 육상 동물이 생겼다해도 꼭 사람이 태어나란 법은 없다.

인류는 나무에서 살던 유인원들로부터 진화했다.

그런데 달이 없는 지구에는 유인원이 살 만한 나무가 없다.

바람이 워낙 세서 유인원이 살 수 있는 키 큰 나무는 쓰러지기 때문이다.

설혹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생겼다해도 그렇게 센 바람 속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 다닐 동물은 없다.

몸이 허공에 뜬 사이 바람에 휘말리면 그대로 땅바닥 행이다.

그런 모든 난관을 뚫고 사람이 생겨났다고 가정하자. 어떤 모습일까. 여기도 강한 바람이 한 몫한다.

우선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땅에 붙어 다니다시피하는 모습이 유리하다.

보기는 흉하겠지만 바람이 시속 3백㎞쯤 되면 이런 모습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날리는 돌을 맞고도 끄떡 없으려면 피부도 두꺼워야 한다.

바람 속에서 숨쉬기도 힘드니 코도 특이한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귀는 사슴처럼 쫑긋하고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바람소리로 인해 특정 방향으로 귀를 기울일 수 없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준 고마운 달. 올 추석에는 조상님께만 말고 달에게 한번 큰절이라도 올릴 일이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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