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위기의 본질-리더십 부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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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의 한국경제는 많은 사람에게 좌절감과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평생을 바쳐 일으킨 기업이 당대에, 혹은 아들대에 무너져버리는가 하면 과로사 직전까지 몸을 던져 일해온 평생직장이 부도에 휘말려 없어지는 월급쟁이에게선 인생의 보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정부관료도 이제는 자신이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자부하기 어렵다.

우리 대부분이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새로운 세기에는 선진국도 되고 통일도 될 것이며 그 과정에 자신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이제는 그런 자신감은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 불안해하고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역수지가 늘어나고 대기업이 계속해서 쓰러지는 것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직장이 없어질지 몰라 불안하고 거래업체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날까 잠이 안오는 기업인도 있다.

당연히 무너진 대기업의 임직원이나 관련 금융기관 사람들의 스트레스 레벨은 아마도 엄청나게 높을 것이다.

'환율비상' 이나 '외환보유고 위기' 혹은 '금융대란' 같은 표현이 필요 이상으로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도 한몫을 차지한다.

물론 주력상품의 수출이 안되는 것도 문제고 과잉생산설비도 걱정거리다.

그러나 정작 위기라고 느껴야 할 부분은 표면에 나타난 경제현상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사회적 리더십이 없다는 것이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할 주체가 없다는 얘기다.

기업을 도산시키고 그래서 많은 사람의 직장을 없애는 결정을 하고 리스트럭처링이란 이름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결정은 인기가 없다.

따라서 누구도 쉽게 그 짐을 지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특정한 정치인이나 관료와 같이 자연인에 의존하기보다 시장원칙이란 제도에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쟁에서 누락하는 기업은 노사 불문하고 망한다' 는 불문율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 주도의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옮아가는 과도기에서 이 원칙 대신 부도유예협약이라는 어정쩡한 정부에 의한 조정의 길을 택했다.

어려운 결정 대신 현실과 타협한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정부만 어려운 결정을 피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 시장경제의 미덕을 강조하던 전경련도 기업의 어려움을 호소할 때는 정부 개입의 불가피성이라는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경제위기의 본질이다.

원칙과 제도 대신 상황논리가 지배하고 그때그때마다 편의적 결정에 의존하다 보면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한국개발연구원 (KDI) 부설 국민경제연구소가 펴낸 '밖에서 본 한국경제 - 외국 전문가의 진단과 처방' 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어려운 결정을 하려는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원칙은 정립되지 못하고 과도기에 정부 개입이 지속되며 도전을 기회로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아문제에 관한 심판의 날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부도유예협약을 연장하지 못하면 법정관리로 넘어가는 어려운 결정을 누군가 해야 한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부총리의 곤혹스러운 입장에 동정이 간다.

누가 그 자리에 가도 어렵고 더 잘할 수 있을 것같지 않다.

그러나 부총리는 바로 결정을 해야 할 그 시점에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짐을 져야 한다.

MIT대학의 크루그먼 교수는 한참 미국경제가 곤두박질치던 80년대말 경제지표의 등락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미국인의 기대가 줄어 정치인에게 제대로 된 리더십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라고 개탄했다 ( '기대체감의 시대' ) .미국은 80년대의 시련을 딛고 현재 가장 강한 경제로 변모했다.

일본이나 우리는 변화의 고통을 회피했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의 적응이 지연되고 있다.

고통스러운 결정을 미국의 정치인이나 경영자나 노조 지도자가 할 수 있었던 배경엔 제대로 된 리더를 고르고 지도층의 결정에 동참한 용기있는 평범한 미국 국민이 있었다.

우리도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어려운 결정을 떠맡아줄 지도자를 골라야 한다.

표를 얻기 위해 당장 듣기 좋은 소리를, 그것도 자리에 따라 말을 바꾸는 지도자는 이제 더 이상 필요없다.

장현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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