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향하는 아시아의 관문 …‘만주노믹스’가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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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를 지배하는 자, 중원(中原)을 얻는다’. 만주(랴오닝·지린·헤이룽장 및 네이멍구 일부)에 기반을 둔 정치 집단은 역사적으로 중원 땅 한족(漢族)정권의 최대 위협 세력이었다. 그들은 한족 세력이 약해졌다 싶으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넘봤다. 멀리 요(遼)나라가 그랬고 금(金)나라, 원(元)나라, 청(淸)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에 한족 정권은 동북지방에 강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감시의 경계를 풀지 못했다.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만주를 먼저 점령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기에 만주는 동아시아 판세를 가름하는 축소판이라는 말이 나온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동북 3성의 핵심 도시인 선양(瀋陽)은 광둥성 선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사는 도시였다. 그러나 발전의 물결은 이곳을 외면했고, 선양의 거리에는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고 동북 3성이 갖고 있는 경제적 가치가 사라졌을까. 아니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비옥한 평원, 유럽으로 가는 아시아의 관문 등 이 지역의 지정학적 경쟁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나타나면서 ‘만주노믹스(만주 경제)’는 최근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만주(동북 3성 및 네이멍구 일부) 땅의 주인인 중국은 이곳에 한 상 가득 잔칫상을 차려놓고 주변국을 불러모으고 있는 중이다.

중국이 이곳 개발에 눈을 돌린 것은 2003년. 국무원(정부)은 당시 ‘동북진흥(東北振興)계획’을 마련, 대대적인 산업구조 개편에 착수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유기업을 과감하게 퇴출시키고, 주요 도시에 개발구를 지정해 첨단 산업 육성에 나섰다. 곳곳에 개발의 열기가 불고 있다. 다롄(大連)에는 연해지역 중점개발 정책이 실시되고, 석유·석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헤이룽장 남부에는 하얼빈-다칭-치치할을 잇는 ‘하다치(哈大齊)공업벨트’가 구축되고 있다. 싼장(三江), 쑹랴오(松遼)등 대평원에서는 옥수수· 대두 등 기계화 농업특구가 지정되기도 했다.

경제에 활력이 붙으면서 주변국의 투자도 활발하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한때 이곳을 장악했던 일본이다. 일본 관동군의 주둔지였던 다롄의 경우 일본 기업들이 일찌감치 터를 잡았다. 약 4000개 일본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다롄이 ‘중국 속의 작은 일본’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다. 일본 정부는 특히 2004년 156억 엔의 정부 차관을 동북 3성의 교육·문화·조림 등의 사업에 사용토록 지원하기도 했다. 소프트 인프라를 깔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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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의 변경무역도 활기를 띠고 있다. 대표적인 중·러 변경무역 중심지인 쑤이펀허(綏芬河)는 헤이룽장 무역의 3분의 1이 이뤄지는 곳. 헤이룽장성 정부는 러시아와의 국경지역에 10㎢ 규모의 중·러 자유무역지대를 지정, 러시아 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움직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러시아는 ‘2008~2013년 극동아시아 발전 계획’을 마련, 러시아 측 접경지역 개발에 나섰다. 모두 220억 달러가 투입될 계획이다.

한국의 경우 STX 다롄 조선소가 본격 가동에 들어가는 등 투자가 늘고 있다. 백인기 KOTRA 다롄무역관 부관장은 “동북진흥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한국·일본·러시아 등 주변국의 투자를 적극 끌어들이겠다는 게 중국의 생각”이라며 “자원·에너지·식량·물류 등 각 지역 특색에 맞는 진출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포스코·LG전자·금호타이어·한라시멘트·농심 등의 업체가 이곳에 진출, 만주 개척의 꿈을 다지고 있다. 유럽과 중국 대륙으로 향하는 물류 중심지이자 자원·에너지의 보고인 만주. 세계 경제위기로 동아시아 협력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아시아의 용광로’ 만주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한우덕 기자

◆만주노믹스=‘만주(Manchu)’와 ‘경제학(Economics)’의 합성어. 만주지역 특색의 경제를 뜻한다. 지역적으로는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등 동북 3성과 네이멍구 동부지역을 포함한다. 중국 전체 국내총생산의 약 10%를 차지하며 석유(전국 생산량의37%), 천연가스(9%), 석탄(8%)등 지하자원과 식량(14%)이 풍부하다. ‘만주노믹스’는 이 지역이 유럽과 중국 내륙으로 향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일본과 서방 등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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