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명예와 지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근속연수가 오래된 교직자가 퇴직할 때 국민훈장이나 국민포장 등으로 포상하는 관행이 있다.

올해도 지난 8월말로 정년.명예 퇴임하는 교원들에 대한 훈장 및 포장수여 발표가 있었다.

유독 교육자에게만 퇴임시 근속연수에 따라 훈.포장 및 표창장등으로 포상하는 것은 아마도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풍토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짐작된다.

사실 국가의 미래를 끌고 나갈 젊은 세대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자기 나름대로의 능력을 개발해주는 일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후세의 교육에 바친 사람들에게 퇴임시에나마 노고를 치하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매년 발표되는 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사회 관행의 잘못된 단면이 드러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포상기준이 매우 획일적이며 사회통념상의 지위에 따라 대상자 예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큰 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거의 예외없이 대학교총장을 하신 분들의 몫이고, 그 외에도 일반적으로 대학교수들이 중.고등학교나 초등학교 교사보다 높은 등급의 훈.포장을 차지하고 있다.

또 중.고교나 초등학교 교직자 중에서도 교장.교감하신 분들이 평교사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있다.

과연 대학교수가 초등학교 교사보다 젊은이들의 인격형성과 능력개발에 더욱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생들과 직접 강의실에서 대면하는 평교사나 교수보다 학교의 '장 (長)' 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나라 교육에 더 많은 기여를 하는 것일까. 사실 이렇게 '지위' 에 따른 포상관행은 이 경우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경찰이나 군부대가 공을 세워도 계급이 높은 사람이 더 큰 훈장을 받고 기업이 잘되면 일반근로자보다 임원진들의 상여금이 더욱 두툼하다.

물론 조직을 책임진 사람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그들이 조직의 성패 (成敗)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소위 '높은 사람' 들은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평소에도 많은 권한을 부여받고 경제적 대우도 더 받는 것이 아닌가.

포상이라는 것은 조직원이 일상적인 역할보다 특별히 잘했을 때 그 공 (功) 을 기리는 것이 목적인것이며 여기에는 지위의 고하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공적 (功績)에 대한 포상도 지위에 따라 하는 것이 관행이 돼 있어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결국 돈과 명예까지 모두 차지하는 꼴이 되고 있다.

아마도 이렇듯 지위에 따라 모든 것이 집중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외국대학의 경우는 총장보다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평교수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총.학장이 돼어야 대접도 받고 좋은 훈장도 탈 수 있다.

외국기업체에서는 최고기술자로 인정받으면 부장.임원이 아니더라도 최고급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장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 평사원 기술자는 생각하기 어렵다.

총장이나 부장으로서 조직을 다스리는 능력은 학문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내고 최고기술자로서 품질을 높이는 능력과는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조직이 단선적 (單線的) 이고 모든 대우가 지위에 따르니 높은 자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돼야 돈도 생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치판에서, 능력이나 경륜에 상관없이 너도 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조직의 성패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일반조직원들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마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지도층이 잘해서라기보다 와이셔츠 하나 더 팔려고 세계 오지를 누빈 회사원들과 반도체의 수율 (收率) 을 높이기 위해 하고 싶은 화장도 못하고 일하는 여성근로자들의 덕이다.

우리들은 학교폭력을 걱정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미국 같은 선진국이 부러워하고 있을 만큼 규율이 잡혀 있는 우리의 초.중등 교육현장도 교육학 교수나 학교장이 잘해서라기보다 학생들과 매일매일 씨름하는 일반 교사들의 노고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제는 그 공 (功) 을 그분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가 아닌가.

오세정 포항공대 방문교수,물리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