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이전 특별법 통과한 날 국회에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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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 194인 중 찬성 167인, 반대 13인, 기권 14인으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2003년 12월 29일 오후 5시13분 국회 본회의장. 박관용 국회의장은 의사봉을 힘차게 두드렸다. 소수여당 대통령의 대선공약에 머물던 행정수도 이전이 법적 추진력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전체 의원 수는 찬성의원(167명)의 28%인 47명에 불과했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했던 한나라당의 입장이 왜 찬성으로 바뀌었을까. 천도(遷都)론과 국민투표 주장은 왜 묻혔을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당시 국회 속기록과 16대 의원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해답이 나온다.

본회의에서 특별법이 통과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5분이었다. 찬반 토론에 4명이 나섰고, 민주당 이희규 의원(17대 낙선)만이 유일하게 반대론을 폈다.

이 의원은 "이 법에서 이전하는 수도의 명칭을 단지 행정수도라고 의미를 축소하지만 국가의 핵심 기능을 이전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천도"라며 "천도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만큼 국민투표에 부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의원의 주장은 "국회 결정을 기다리는 500만 충청지역 주민들의 절절한 소망을 헤아려 달라"(한나라당 전용학.충남 천안) 등의 찬성론에 묻혔다.

본회의장 분위기가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직전 의원총회에서 민주당은 크로스 보팅(자유투표)을, 한나라당은 찬성 당론을 정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격론 끝에 최병렬 대표가 찬성 결정을 주도했다.

수도권과 영남권 의원들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최 대표는 "설령 법이 통과돼도 실제로 수도 위치의 선정이나 예산 등에 대해 국회가 언제든지 제동을 걸 수 있다"며 "대선에 이어 총선에서 충청표를 노리는 노 대통령의 수에 또 당해선 안 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정 반대하는 사람은 표결 때 아예 본회의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했다고 한 핵심 당직자는 말했다.

특히 총선을 4개월 앞두고 선거승리의 변수를 쥐고 있는 충청권 의원들의 탈당 압박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임태희 전 대표비서실장은 17일 "의총 직전 충청권 의원들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의사를 최 대표에게 밝혔다"고 말했다.

최 대표의 핵심 측근은 "당시 충청권의 신경식 의원 등 14명이 집단탈당 결의서를 내보였다"며 "대여(對與) 투쟁을 앞두고 이들이 탈당하면 국회 과반수가 무너진다는 점을 우려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최 대표와 홍사덕 총무 등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박근혜 현 대표도 찬성 대열에 합류했다.

최근 행정수도 이전문제가 불거지자 박 대표가 "공당이 한번 찬성해놓고 입장을 뒤바꾸는 것도 문제"라며 신중론을 견지하는 건 이런 부담 때문이다.

박 대표는 지난 4월에도 충청지역 언론간담회에서 "행정수도 이전은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으므로 아무 걱정하지 마라"고 한 적이 있다.

반면 김덕룡 원내대표는 당시 표결에서 기권했다. 현재 한나라당 내에서 그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탈당 카드까지 내보이며 당론 변경을 이끌어낸 당시 한나라당의 충청권 의원들은 지난 총선에서 모두 낙선했다.

한나라당도 최 대표의 설득 논리와 달리 '국회가 언제든지 제동을 걸 수 있는'의석을 얻는 데 실패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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