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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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하네요. 처음에 전화를 받은 여자분은 자신이 앞집 여자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앞집에 계셨다니, 무슨 미로게임을 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져요. " 얼핏 듣기에는 농스런 어조 같았지만, 그것의 이면에는 서늘한 냉소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미로게임이 맞을거요. 아침부터 그럴 일이 좀 있었는데…. 그런 거야 뭐 늘 있는 일 아니겠소?

이런 게 미로게임처럼 느껴졌다면 이예린씨도 이미 미로 속으로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 방심하면 안 될거요" 무슨 이유 때문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은 영우를 돌아보며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긴장은 내내하고 있어요. 선생님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로게임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결코 방심하지 않을 거라구요. 설마, 어젯밤에 약속하신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어느날 저녁, 맥주나 레모네이드?" "네, 그거요. 오늘 저녁에 그 약속을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 드린건데…. 괜찮을까요?" "오늘 저녁?" 갑자기 의표를 찔린 기분이 들어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이달말까지 촬영을 마무리하려면 오늘이나 내일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억지스런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 더이상 에돌아 말을 할 만한 여유가 없다, 하는 걸 그녀는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좋소,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도록 합시다.

하지만 이예린씨가 생각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런 부담도 갖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밝혀 두고 싶소. 자칫했다간 만나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가 생겨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요. "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럼 저녁 여섯시 경에 제가 오피스텔 일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갈까요?" "커피숍?" "네, 방송국에서 그 오피스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거든요. 그리고 거기서 맥주나 레모네이드를 마실 수 없으면 다른 곳으로 옮기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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