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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나누는 연극의 거리로 만들 겁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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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입술은 허옇게 부르트고 피부는 꺼칠했다. 대학로에서 만난 배우 김갑수는 “감기와 피곤함에 절어 있다”고 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카메라 렌즈가 다가오자 눈동자가 빛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김갑수(52)는 지난해 방송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선 순정파 드라마국 국장 역을, ‘타짜’에선 악마 같은 아귀 역을 맡았다.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이처럼 넓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TV와 영화 일을 ‘바깥일’이라고 부른다. 무대에 서는 게 본업이고 연극의 거리인 서울 대학로가 고향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대학로 살리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름하여 ‘희망연극 프로젝트’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연극의 거리로서 대학로의 명성을 되찾고 연극으로 희망을 나누기 위해 대학로 브랜드를 알리려는 마케팅 활동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연극을 볼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관람료를 내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공연장으로 무료로 초대하는 행사다. 김씨는 희망 연극 프로젝트의 하나인 ‘아름다운 인연’에서 박수무당 역을 맡아 무대에도 오르고 있다. 그가 1997년 창단한 극단 ‘배우세상(02-743-2274)’과 함께다. 다음은 일문일답.

-‘아름다운 인연’ 관람료가 1만원이다.

“관람료는 극장 크기에 맞춰야 한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한다고 무조건 많이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 관객이 극장까지 찾아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여기까지 와주는 것도 고맙고, 또 희망 프로젝트는 어차피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엔 오히려 극이 끝난 뒤 관객들이 찾아와 ‘이런 관람료로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하기도 한다. 허허. 이렇게라도 연극의 소중함을 좀 더 많은 분과 나누고 싶다.”

-연기를 처음 시작한 게 대학로라고 들었다.

“(어렸을 때) 안 해본 일이 없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내가 벌어서 먹고살아야 했다. 가구공장에서 못질도 해봤고, 시계공장에서 시계 유리도 손질했다. 그러다 우연히 극단 현대극장 단원 모집공고를 봤다. ‘야, 멋있겠는데’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대본을 말아서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버스를 타면 얼마나 내가 근사해 뵈던지. 그런데 연극을 알아가면서 ‘이건 아니다’ 싶더라. 연기란, 연극이란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더라. 스승인 고 김상열 선생님께 정말 많이 배웠다. ‘세상을 시인의 눈으로 따뜻하게 보라’고 가르치셨다. 연기에 대한 진실, 무대에 대한 진심을 배웠다. 물론 몽둥이로 맞기도 많이 맞았다.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에 공부도 더 열심히 했다.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며 영화도 많이 봤다.”

-그렇게 연기를 시작한 게 77년인데 84년에 한용운 시인의 일대기 ‘님의 침묵’에서 주연을 맡았다.

“무대에 주연으로 너무 빨리 서는 거 안 좋다. 몇 년은 어렵게 가야 한다. 당시 ‘님의 침묵’에서도 원래는 주연이 아니었다. 스태프 간 불화가 있어서 주연이 바뀌어야 했는데, 김상열 선생님께서 ‘갑수야, 네가 해라’고 지목하신 거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자료도 많이 찾았고, 무엇보다 한용운 선생과 친했던 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생가도 직접 갔고, 한용운 선생이 계셨던 칠보사에서 머리도 깎았다. 총체적 이미지를 위해서다. 연기란 치밀한 계산이다. 기분이 안 좋다거나 몸이 안 좋다고 제멋대로 하는 건 용납이 안 된다.”

-요즘 연극이 너무 위축된 거 아닌가.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 다만 열심히 하지 않는 연극은 당연히 혼나야 한다. 정열과 열정이 없으면 야단맞아야지. 무대에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해야 한다. 좀 안다고 까불면 안 돼. 자만은 금물이다.”

-연극의 어떤 점이 그리 좋은 건가?

“연극은 감각주의나 표피주의가 통하지 않는 분야다. 인간을 얘기하는 자리다. 각오를 해야 한다. 재미를 찾으려면 TV의 버라이어티 쇼를 보면 된다. 하지만 사람을 얘기하려면 무대로 오면 된다. 연극을 하는 이도, 보는 이도 모두 이런 책임을 갖고 무대에 임해야 한다. 연기란 수학공식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안 그러면 견디기 힘드니까. 돈도 안 되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나.

“중년 애정물. 나이가 든 사람들의 사랑 얘기를 하고 싶다. 4월에 드라마를 하나 시작하는데, 거기에선 아버지 역할이다. 언젠간 중년의 멜로가 중심축인 드라마나 영화·연극을 하고 싶다. 한국엔 나이 든 사람들의 연애 얘기가 너무 없다. 나이 들었다고 연애까지 못하면 억울해.”

-배우로서 모토가 있다면.

“과거는 똑같고, 미래는 알 수 없고, 현재만이 진짜다. 진짜에 충실해야 한다.” 

전수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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