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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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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랏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과중한지 정치인 중엔 알코올 중독이 의심스러운 술꾼이 여럿이었다. 영국의 명재상 윈스턴 처칠이 대표적이다. 그의 딸이 ‘아빠의 칵테일’이라 명명했던 물 탄 위스키를 종일 홀짝거렸다. 점심과 저녁 식사 때 반주로 샴페인 한 병은 기본이었고 밤참 삼아 브랜디 1쿼트(약 1리터)를 뚝딱 해치웠다. 주변에서 좀 줄이라 해도 “술은 음식인데 뭘”이라며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럼에도 그가 술 때문에 실수했단 기록은 별로 없다. “남들 앞에 취한 꼴을 뵈는 것만큼 한심한 게 없다는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하니 나름대로 주량을 지켜 마신 게 그 정도인 모양이다.

하지만 모두가 처칠처럼 절주(?)를 실천한 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지도자 3인방 중 나머지 둘만 봐도 그렇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종종 술을 과하게 마시는 바람에 침대로 실려가곤 했다. 그 와중에도 스탈린은 부하들을 지팡이로 마구 때리며 “네 놈들이 내 술을 훔쳐 먹었지?”라고 욕을 해댔다니 이만저만 중증이 아니다.

주사에 관한 일화가 많기론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을 따라갈 자가 없다. 1994년 독일 방문 때 환영식 무대에 뛰어올라 춤추고 노래하며 군악대 지휘까지 하는 원맨쇼를 펼친 건 애교에 속한다. 같은 해 아일랜드에 가선 대취해 비행기에서 못 내리는 통에 정상회담을 펑크 냈다. 97년 스웨덴에선 핵무기를 3분의 1로 줄이겠다는 흰소리로 관료들을 진땀 나게 했다. 교황 앞에서 ‘사랑하는 이탈리아 여인들을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하거나 숟가락으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의 대머리를 북 삼아 두드린 건 또 어떤가.

과도한 술 사랑으로 물의를 빚은 정치인들의 기나긴 명단에 최근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일본 재무·금융상이 이름을 올렸다. 로마에서 열린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만취 상태로 참석한 게 딱 걸렸다. 횡설수설하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인터넷에 인기 동영상으로 떠돌자 비난이 빗발쳐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나라 경제가 신음하는 판에 경제 수장이 외국까지 나가 망신살이 뻗쳤으니 민심이 성날 만도 하다. 총리 사퇴론에다 자민당의 반세기 집권을 끝장내자는 주장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민당이 저녁 회식 자리에서조차 금주령을 내렸다는데 글쎄다 싶다. 악재가 넘칠수록 술은 더 당기는 법인데 금한다고 다들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