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 CCTV 70대와 통신.카드사 서버에 기록되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SUNDAY
길을 지날 때, 식당에 들어갈 때…. 우리의 일상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보통신산업의 발달로 지켜보는 눈도 많아지고 방법도 다양해졌습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봤던 CCTV 같은 감시의 눈은 범죄 수사나 예방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수단이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기자의 집은 서울 잠실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지은 지 30년이 지났습니다. 시시때때로 재건축 얘기가 나올 정도로 각종 시설이 낡았습니다. 3900여 가구가 사는 초대형 단지지만, 요즘 흔한 전자 출입카드는 물론 CCTV도 단 한 대도 없습니다. 이곳도 다음달 말에는 188대의 CCTV 카메라가 깔립니다. 지난 설 연휴 기간 한 동에서만 두 집이 도둑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 뒤에 내려진 결정입니다.

한 달 뒤 깔릴 CCTV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생각하며 출근길에 나섭니다. 아파트 뒤 쪽문을 나와 지하철과 연결된 잠실 지하상가로 내려가면 세상이 갑자기 30년 업그레이드됩니다. 140개의 상점이 모여 있는 이곳에는 27개의 크고 작은 CCTV가 설치돼 있습니다. 상가 한구석에 있을 관리사무소에서는 경비 아저씨가 27개의 화면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잠실역 개찰구로 들어섭니다. 머리 위쪽으로 3대의 CCTV 카메라가 기자를 지켜봅니다. 제 영상은 5987대의 서울지하철 CCTV 영상과 함께 사당동 서울메트로 관제센터로 흘러갑니다.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갖다 대자 “삑” 소리와 함께 ‘900원’이 찍힙니다. 플랫폼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머리 위 카메라가 신경 쓰입니다. 28분이 걸려 시청역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플랫폼의 CCTV 아래를 지나 출구로 나옵니다. “삑~” 소리와 함께 ‘100원’이 찍힙니다.

출발·도착지와 시간 등 교통카드 이용정보는 곧바로 광화문 국민은행 신용카드그룹 컴퓨터 서버로 들어갔을 겁니다.
회사에 도착합니다. 로비 입구에서 RFID(Radio-Frequency IDentification) 출입증을 갖다 대고 출입구를 지나갑니다. ‘사원번호 950*** 중앙일보 최준호 기자, 09시30분 건물 안으로’라는 정보가 지하 1층 방제실 컴퓨터 서버로 들어갑니다. 아 참, 로비에 있는 2개의 CCTV가 나를 지켜봤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역시 같은 BI 방제실 모니터에 내 모습이 나타납니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e-메일부터 확인합니다. 기사 작성 전용 소프트웨어를 열어 간밤에 올라온 뉴스를 점검합니다. 그중 하나를 공용 프린트로 출력합니다. 제 e-메일은 정보관리 담당자가 열어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무슨 기사를 봤는지, 프린트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회사 메인 컴퓨터에 저장됩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CCTV가 달린 경찰청 앞 거리를 지나 후배 두 명과 김치찌개 집으로 갔습니다. 3인분에 라면 한 개를 넣어 먹고 현대카드를 그었습니다. ‘2009-2-19/13:05/일시불/19,000원/장호왕곱창’. 이번에는 여의도 국회 앞 현대카드 6층의 부정방지사용(FDS) 시스템 서버에 거래정보가 지나갑니다.

다시 CCTV와 출입카드 인식 출입구를 거쳐 회사로 들어옵니다. 일을 하는 것은 곧 회사 메인 컴퓨터에 계속 정보를 쌓아 보내는 겁니다. 퇴근길은 아침에 만났던 지하철 개찰구 단말기와 CCTV, 상가 CCTV 등을 역순으로 만납니다. 아직은 CCTV가 없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야 나를 지켜보는 무언가가 사라졌습니다…. 아차, 아닙니다. 바지 왼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전화를 깜빡했습니다.

이놈은 하루 종일 내게 붙어 다니며 언제, 누구와 통화했는지,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모조리 을지로2가 SK텔레콤 컴퓨터 서버에 보고했습니다. 오늘 내 통화내역은 6개월, 위치정보는 한 달 반 동안 보관될 겁니다. 이날 저는 70대의 CCTV에 저장되고, 4개의 거래 내용이 카드사에 보고당했습니다. 회사 컴퓨터를 통해 내 기록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CCTV는 도둑을 쫓아 줍니다. 신용카드·교통카드는 편리합니다. 현금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내가 얼마를 썼는지 기록할 필요도 없습니다. e-메일은 편지를 보내고 기다리는, 인터넷 서핑은 발품 팔고 돌아다니는 수고를 덜어줬습니다. 휴대전화는 대화에서 공간의 개념을 없애 버렸습니다. 연말정산은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클릭 몇 번으로 해결했습니다. 안전과 편리를 누리는 데 공짜란 없습니다. 카드 거래 내용은 카드사 서버에서 분석·분류돼 고객관계관리(CRM) 마케팅에 이용됩니다. 강도를 지켜보라고 세운 CCTV에는 나도 몰래 내 모습이 기록됩니다.

“부끄러울 일이 없다면 뭐가 걱정이냐. 그까짓 것 가지고 까칠하긴…. 난 좋기만 하구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994년 지존파는 한 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빼내 살해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지난해에는 GS칼텍스 회원 1150만 명의 정보가 유출된 일도, 반도체 업체 직원이 컴퓨터에 들어 있는 정보를 외국에 팔아 넘기다 적발된 일도 있었습니다.

꼭 범죄자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왜 만 17세가 되면 모든 국민이 열 손가락 지문을 찍고 주민등록번호를 받아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전 국민의 지문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웹사이트 곳곳에는 개인 주민등록번호들이 이름과 함께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과거 따로 떨어져 있던 각종 DB가 한곳으로 모일까 걱정입니다. 좋은 목적이겠지만 악용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행정전산망에는 주민·부동산·자동차·세금·병무 등 12개 분야 42종의 행정정보가 연결돼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는 법원·노동부 등 국가기관의 개인정보 유출로 피해를 본 사례가 수시로 올라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김민태 조사관은 “우리나라는 개인정보 유통과 인권침해에 대한 규제는 고사하고 현황 파악마저 제대로 안 돼 있다”며 “기술과 감시수단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데 정부는 물론 국민도 이런 사실에 둔감한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최준호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