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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禁忌語가 없는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영국 의회는 언제나 일이 많고 시끄럽다고 한다.

한가지 주제에 대해 의원 한 사람의 발언시간이 두 세시간을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 의회는 '토크숍' 이라 불린다.

우리말로 하면 '말 가게' 다.

그러나 말이 많아서만 말 가게인게 아니라 거기엔 그야말로 이것 저것 참고할만한 '말 상품' 이 그득하다는 뜻도 함께 한다.

의원들의 발언은 언제나 유머.위트.뛰어난 비유를 자랑한다.

그들의 발언을 글로 옮기면 가감 없이도 한편의 논설이 된다.

또 영국 의회의 의원들은 이렇게 말만 가다듬는게 아니라 발음까지도 신경을 쓴다고 한다.

온 국민이 주시하고 있으니 표준어를 구사하고 정제된 어휘를 선택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사항이 아니겠느냐는 처신의 발로다.

우리는 어떤가.

뛰어난 논설까지는 기대하지 못한다 해도 들어서 귀에 순한 말이라도 됐으면 좋으련만.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신문사설을 텍스트로 한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의회의 발언록을 참고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어떤 학생이 그걸 참고하려 한다면 지도교사가 펄쩍 뛸 일이다.

거기엔 유머도, 위트도, 뛰어난 비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제의 느낌을 주는 문장도 없기 때문이다.

근간 대변인의 논평에 동원된 어휘들을 훑어보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진갑환갑 다 지낸 노인들' '구악의 원조 부패의 원조' '아스피린을 상시 복용해야 할 치매환자' '배은망덕한 대권병자' '마녀사냥' 등등. 보통사람들도 막말을 하기란 쉽지 않다.

아주 감정이 격해져 싸움하는 지경이 아니면 대체로 말을 가려서 하고 가능하면 듣기 좋은 말, 덕담을 하려 한다.

그런데 이른바 지도층인 정치인들은 상대를 치매환자로 몰면서 스스로의 도덕성 결핍증을 온 천하에 과시한다.

옛 시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 말을 것이/남의 말 내하면 남도 내말 하는 것이…. ' 송강 (松江) 정철 (鄭澈) 의 말이다.

남의 말을 내가 하면 남도 내 말을 할 것이니 가급적이면 삼가라는 충고다.

이 시조에서 송강은 아예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하며 입을 다물어버린다.

정치란 말로 하는 것이고 대변인의 본업은 말하는 것이니 '말 말라' 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엔 반드시 할 말 안할 말이 엄연히 있다.

국민이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마당엔 금기어 (禁忌語)가 없다.

아무 말이고 막한다.

마치 욕설시합을 보는 것같다.

대변인들은 서로 누가 더 악랄한 어휘를 뽑아 쓰는지 경쟁하는 것같다.

정치엔 어느 정도의 과장과 센세이셔널리즘이 용인된다.

그것은 때때로 대중들의 감정 해소를 위한 약방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듣기에 괴롭고 짜증스러운 말이라면 그것은 품위의 문제를 넘어 도덕성 내지 인간성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제도적인 틀 말고도 보이지 않는 일정한 선이라는게 있다.

바로 인간성에 대한 긍정과 신뢰다.

정치권이 여야로 나뉘어 서로 시비를 가리려 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모아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경륜을 펴려는데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선전 내지 선동까지도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도 대체로 너그럽다.

그러나 상대방을 마녀사냥꾼.치매환자로 매도하는 정도에 이른다면 곤란하다.

상대의 인간성을 무시하고서야 무슨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가.

다만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니 까마귀의 암수를 가리는 일과 다를게 없다.

지금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자신들을 대변해줄 인물.정당을 고르지 못했다는 부동층이 많다.

그런 경향은 특히 중간층에서 두드러져 보이는데, 짐작컨대 그들이 바로 정치형그룹이 아닌가 싶다.

정치가 모범답안이 되기도 어렵고 정치인이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이기를 바라기도 어렵다.

그러나 일부러라도 도덕성을 과시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의 한계 - 인간성에 대한 긍정과 신뢰만큼은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스스로 교육받은 사회인이기를 포기하고 지성인이기를 외면한다면 우리에게 되돌아 올 인과는 무엇일까. 국민성의 타락, 사회질서의 지반 침하가 아니겠는가.

말만이라도 가려서 하는 정치가 아쉽다.

<고흥문 전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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