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세돌 앞에 중국 자존심 무너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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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세돌 9단(左)이 한국 우승을 확정시킨 뒤 구리 9단과 복기하며 모처럼 활짝 웃고 있다. 농심배에 한국 대표로 처음 출전한 이세돌은 중국 바둑의 황금 투톱인 창하오와 구리를 연파하며 세계 최강자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사이버오로 제공]


19일 오후 3시(한국시간) 상하이 한국문화원에서 벌어진 제10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본선 13국. 동갑내기 라이벌인 한국 최강자 이세돌 9단과 중국 최강자 구리 9단이 격돌한 이 한판엔 양국 바둑 팬들의 시선이 온통 집중됐다. 한국의 네 번째 선수로 출전한 이세돌은 전날 중국의 2인자 창하오 9단을 흑 불계로 격파하며 대 창하오전 12연승을 기록했다. 한국은 이창호 9단이 주장으로 버티고 있는 반면 중국은 이제 구리 9단이 마지막이었다. 중국에선 구리가 이세돌과 이창호를 연파하고 중국 바둑의 자존심을 세워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한국 팬들은 이세돌이 상대 전적 7승7패의 숙적 구리마저 제치고 세계 최강자의 진면목을 보여 주기를 소원했다. 더구나 이세돌과 구리는 며칠 후인 23일 백담사의 만해마을에서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을 치르게 돼 있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출발은 구리가 좋았다. 포석은 이세돌의 약점이자 구리의 강점. 초반의 격전이 끝났을 때 바둑판 위엔 백의 시체가 즐비했다. 흑은 사방이 두텁고 백은 비틀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날 인터넷 중계에서 생애 처음 해설을 맡은 16세 박정환 4단조차 대선배를 향해 “백의 분발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세돌 9단은 ‘실리’에 집중했다. 모양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 상대 진영을 파고들었다. “엷다. 너무 엷다”는 걱정이 이어졌으나 이세돌 9단은 신들린 듯한 타개 감각으로 판을 헤쳐 나갔고 어느 순간 살펴보니 판은 이미 역전돼 있었다. 이때부터 이세돌 9단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착실한 플레이로 승리를 다져 3집 반을 이겼다. 구리는 아마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세돌 9단은 농심배를 앞두고 “구리 9단은 포석이 매우 강하다. 포석에서만 밀리지 않는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날 대국은 포석에서 크게 밀리고도 승리했다. 이세돌의 바둑이 더욱 절정에 접어들며 수읽기에서 구리를 압도한 탓이었다.

농심배는 한·중·일 3국이 5명의 대표선수를 내보내 연승전으로 겨루는 국가 대항전. 처음 중국의 신예 퉈자시가 4연승을 거두는 바람에 중국이 크게 앞서 나갔으나 한국의 강동윤 8단(당시)이 5연승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일본은 17일 다카오 신지 9단이 창하오에게 패배하면서 모두 탈락했고 농심배는 한국과 중국의 ‘황금 투톱’이 2대 2로 겨루는 형국이 됐다. 사실 이들이 2대 2로 맞붙으면 어찌될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번 이세돌 9단이 2연승을 거두며 한국이 한 수 위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우승상금은 2억원. 대국료와 연승상금은 별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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