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tyle] 추억을 녹여 지갑을 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향수 마케팅이 시작됐다. 향기를 담은 액체 향수가 아니라 시인 정지용이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했던 그 향수(鄕愁) 얘기다. 30대는 20대가 입을 법한 깜찍한 속옷에 열광하고, 10여 년 전 운명을 달리한 추억 속의 스타는 기술의 힘으로 부활해 다시 팬들 앞에 섰다. 경제 불황 속에서 소비자의 닫힌 지갑을 열기 위해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모든 것이 동원되고 있다.

강승민 기자

 #가슴 뛰는 그때 그 시절

1990년대 인기 힙합그룹 듀스의 멤버였던 고 김성재가 올봄 새로 출시하는 청바지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 됐다. 올드 팬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스탤지어 마케팅’의 하나다. [리플레이 제공]

영화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80대 노인으로 태어난 주인공 벤저민 버튼이 세월이 흐를수록 젊어지는 삶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쉰을 넘을 때쯤, 벤저민의 외모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된다. 곁에서 죽 그를 지켜 봐 온 연인은 그를 부러워한다. 자신에게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때 그 시절’이지만 벤저민에게는 현재인 젊음이 연인에게는 곧 향수로 다가온 것이다. 요즘 불고 있는 ‘노스탤지어(향수) 마케팅’의 한 예다.

회사원 민진아(29)씨는 지난 13일 인터넷에 공개된 한 동영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말을 못했어요.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빠’의 모습을 보니 새삼 ‘오빠’도 그립고 제 소녀 시절도 그립더라고요. 팬클럽에 가입해서 쫓아다니고 소리치고 열광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으니까요.”

그가 말한 ‘오빠’는 힙합그룹 듀스의 멤버인 고 김성재다. 민씨가 본 동영상은 1997년에 ‘말하자면’이란 노래를 부르던 듀스의 콘서트 장면과 당시 김성재가 옷을 갈아입던 무대 뒷모습 등을 이어 붙인 1분짜리 광고다. 유럽 청바지 브랜드 리플레이가 다음 달에 새로 선보이는 광고 모델로 이미 고인이 된 김씨를 기용한 것이다. 이 독특한 광고는 김씨의 초상권을 가진 김씨 어머니의 허락을 얻은 다음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완성·공개됐다.

오는 20일엔 김성재의 또 다른 미공개 영상이 발표되고, 3월호 패션 잡지 등에는 그의 모습과 브랜드의 패션 스타일링을 합성한 화보 등이 게재될 예정이다. 동시에 듀스 멤버이자 작곡가인 이현도는 2009년판 ‘말하자면’의 편곡을 허용했다. 듀스의 팬클럽은 지금 기대에 가득 차 있다. “고인을 이용한 상술”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감수성 예민했던 우리의 청소년기, 그때 그 시절의 스타일 아이콘이자 스타였던 김성재가 돌아온다”며 기뻐하는 팬들이 더 많다. 리플레이 마케팅 담당 한현선 과장은 “브랜드의 주 타깃이 패션에 관심 많은 25~35세 소비자다.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한 번 보면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추억 속의 스타를 끄집어 내려 했다”고 이번 작업의 동기를 설명했다. 같은 동영상을 본 회사원 김영수(34)씨는 “듀스는 우리에게 전설이다. 대학 시절 듀스의 노래에 맞춰 록카페를 오갔는데, 지금 보아도 성재형은 여전히 멋있다. 예고편 영상 다음이 궁금해진다”고 했다. 10여 년 전의 스타가 김씨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 것이다.

# 감성코드로 소비자 마음 열어

‘노스탤지어 마케팅’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중앙포토]

카네기멜런 대학 엔터테인먼트 연구소의 아르납 바수 연구원은 최근의 마케팅 보고서에서 ‘노스탤지어 마케팅’을 이렇게 정의했다. “젊은이들은 꿈을 갖고 산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그래서 노스탤지어 마케팅이 효과를 보는 것이다.” 김성재의 동영상을 감상한 민씨와 김씨의 반응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분석이다.

트렌드 정보회사 피에프아이엔(PFIN) 이정민 이사는 “노스탤지어 마케팅은 최근의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대응하는 업체들의 감성 마케팅 중 하나다. 불황으로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땐 소비자의 마음을 녹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감성 코드다. 그 핵심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향수를 자극하는 방법이다.”

2004년에 연기자 이혜영이 선보인 속옷 브랜드 미싱 도로시는 노스탤지어를 아예 브랜드 컨셉트로 설정하고 있다. 브랜드 이름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 ‘도로시’의 이름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이라는 영어 ‘미싱(missing)’을 조합한 것이다. 여기에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20대의 몸매를 유지하며 젊은 스타일링을 즐기는 이혜영의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것도 노스탤지어 전략이다. 미싱 도로시 문영우 대표는 “디자인 컨셉트는 20대 초반이지만 20대 중후반과 30대 이상에서 훨씬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달에는 CJ홈쇼핑을 통해 분당 420만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미싱 도로시’는 노스탤지어를 컨셉트로 해 이혜영을 대표 모델로 내세우고 있다. [미싱 도로시 제공]

이정민 이사는 “경제 호황기엔 단순히 옛것의 분위기를 현대로 옮겨오는 ‘레트로(복고)’가 유행하지만, 불황기엔 진짜 그 시절을 그리워하도록 감성에 직접 호소하는 전략이 많이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은 예전에 좋았던 것들을 훨씬 잘 기억한다. 익숙한 데다 좋은 이미지까지 가진 옛것은 불황으로 새로운 모델을 찾을 여력이 없는 업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노스탤지어 마케팅이 불황으로 다친 소비자의 마음을 달래는 한편, 업체나 브랜드의 불안한 재정 상태까지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