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빅3’가 빛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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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로 절대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미국은 아직도 세계 자동차 판매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단일시장이다.

미국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상대적으로 싼 유가 덕택에 공룡 같은 거대 몸집의 SUV·픽업들이 잘 팔렸다. 그래서 이 시장의 강자였던 미국 빅3(GM·포드·크라이슬러)는 다른 메이커들의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요즘 빅3를 보고 있자면 공룡의 멸종이 떠오른다. 수억 년 동안 번성했던 공룡들이 급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멸종했다. 공룡의 입장에서 보면 운명이기는 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다. 빅3 최고 경영진이 구제금융을 위한 의회 청문회에서 ‘지금의 위기는 자동차시장과 무관한 주택시장에서 야기된 초유의 금융위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때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급변하는 자동차시장에서 특정 시장의 성공에 심취한 나머지 미래 대응을 소홀히 한 측면이 크다. 또 그동안 번 돈을 노동조합 관련 복지 등에 쓰고 금고를 비워 놓은 빅3 경영진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비난 때문에 100년 넘게 지속된 미국식 차 만들기의 가치가 무시되거나 잊혀선 안 된다.

미국 소비자들은 귀족 취향의 우아한 장식이나 감각적 디자인보다 실질 가치와 효용을 중시해 왔다. 확실한 기능, 편리한 사용, 튼튼한 내구성, 쉬운 수리, 저렴한 가격이 선택의 기준이었다. 자동차도 매력적인 첨단 기술을 자랑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하게 쓸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 개발했다. 자동 시동장치, 파워스티어링, 자동변속기 등이 미국에서 최초로 개발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대하는 마음 자세도 다르다. 유럽 소비자는 자동차의 기계적 성능과 스타일을 즐긴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자동차가 주요 자산이자 신분 상승의 도구로 쓰인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겐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자 같이 있어 좋은 털털한 친구나 커다란 애완견 같은 존재다. 기분 내키는 대로 같이 놀다가 화가 나면 발로 차기도 하고 물도 확 끼얹는 미국 운전자들의 행태를 보자. 행여 내 차에 흠집 날까 신경 쓰면서 쓸고 닦는 데 익숙한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장인정신에 입각해 자기만의 독특한 취향의 차를 만드는 유럽 업체와 달리 미국 업체들은 차량 스타일도 반복적 시장조사를 통해 그 시대의 트렌드와 목표 계층의 눈높이에 맞춘다. 3, 4년 주기로 모델을 바꾸고 그 사이 매년 조금씩 스타일과 사양을 변경하는 것도 미국에서 시작됐다. 그래서인지 필자 같은 기계치는 유럽 고급차에 앉으면 멋지기는 해도 제대로 쓰기가 어렵고 위압감이 느껴진다. 반면 미국차는 처음 접해도 쉽게 쓸 수 있고 시각적으로도 편안하다.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대적으로 우월한 문화는 각 지역으로 전파돼 간다. 비록 지금 시대를 잘못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햄버거나 청바지로 대표되는 미국 실용주의 문화는 건재하다.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물어보고 철저히 시장에 맞춰 온 미국식 차 만들기의 가치는 빅3의 운명과 관계없이 변함없는 경쟁력으로 빛을 더해 갈 것이다.

자동차문화 평론가 (GE코리아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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