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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의 치명적 유혹 ‘제3의 경제위기’ 부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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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04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오바마 미국 대통령.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말, 일단의 군중이 미국 워싱턴 의사당 앞에 집결했다. 각지에서 몰려든 묘비 제작업자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관세를 올려서라도 일자리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이탈리아 등에서 수입된 묘비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농민과 노동자, 각종 산업계 대표자들도 모였다. 역시 요구는 관세 인상이었다.

13일 美 의회 ‘바이 아메리칸’조항 통과

반 년여를 버티던 허버트 후버 당시 미국 대통령은 결국 이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경제학자 1028명이 연대 서명까지 하며 반대했지만 그는 보호무역법인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Bill)에 서명했다. 30년 6월 17일이었다. 곧 철강 등 2만 개 품목의 관세가 100~400% 급등했다.

대공황 이후 80년이 흐른 지금. 세계 곳곳에선 비슷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미 자동차·철강 업계의 경영자·노동자들은 ‘바이 아메리칸(미국산 우선 구매)’을 요구하고 있다. 역시 명분은 일자리 지키기다.

영국 노동자들은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인에게 줘야 한다”며 자국 기업들에 영국에 우선 투자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각각 100만 명 정도 모여 비슷한 시위를 벌였다. 그리스에서는 실직자들의 시위가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노동자들의 잇따른 시위는 각국 지도자들에게 정치적 압력이 되고 있다. 압력이 커지면서 주요 국가 정치 지도자들의 대응도 후버와 비슷해지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공정무역을 주장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의회의 보호무역 조치를 묵인했다. 입으로는 “바이 아메리칸 조항을 반대한다”고 했지만, 관련 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는 하지 않았다. 오바마뿐만이 아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도 잇따라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후버만큼 노골적이고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 속에 갇혀 있던 ‘보호무역주의 악마’가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각국 정부, 일자리 압박에 흔들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바이 아메리칸 조항을 “전형적인 무역장벽”이라고 비난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바이 아메리칸에 맞서) EU의 자동차 지원금도 EU산 부품만 사는 데 쓰겠다”며 맞받았다.

상대 국가의 보호무역 조치에 대해 강력한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자신들의 자국산업 보호 조치는 보호무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공정 무역(Fair Trade)을 위한 노력’이라고 둘러댄다. 불공평한 시장 개방이나 환율 조작을 통한 수출 촉진 등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무역을 외쳐왔던 입장을 확 바꾸기 어려운 데다, ‘보호무역은 다같이 망하는 길’이란 사실을 세계 지도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맨큐(경제학) 하버드대 교수는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점을 감추기 위한 언어의 마술이 범람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주요국 정치 리더들이 보호무역주의 유혹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면에는 위기가 낳은 다급함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일자리를 유지하면서 경기를 끌어올려야 하는 절박감이다.

게다가 천문학적인 금융 구제가 정치 리더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시장 자유 원칙을 거스르며 세금으로 민간 금융회사들을 살렸다. 심지어 금융회사의 부실화할 자산까지 정부가 지급 보증했다. 여차하면 은행을 국유화할 태세다.

그 여파로 “경제 주체들이 자유무역 원칙을 하찮게 보기 시작했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지적했다. 시장 자유 원리를 무시하고 정부가 금융시장에 개입했듯이 일자리와 경기 부양을 위해서는 자유무역 원리에 집착하기보다 ‘예외적인 조치(무역장벽)’를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대중의 마음속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면에는 금융산업에 대해 누적된 반감도 자리잡고 있다. 미 경제정책연구소(CEPR) 공동 소장인 딘 베이커는 “월스트리트 등 금융권이 위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들이 앞장서 주장해 온 세계화와 자유무역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뉴욕 타임스(NYT) 칼럼에서 “자유무역은 좋고 보호무역은 나쁘다는 말은 학문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신 나라가 경기 부양을 하면 다른 나라는 그 비용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이익을 볼 수 있다”며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선 상대 나라도 경기 부양을 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선 보호무역이 차선책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 주요 국가에서 자유무역 논리가 얼마나 도전받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맨큐는 “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결 이후 60여 년 동안 유지돼 온 자유무역 원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금융보호주의: 새로운 무역장벽
최근 보호주의의 흐름에는 또 다른 특징이 엿보인다. 민간자본 이동마저 억제하려는 움직임이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회사들에 자국 기업에 우선 자금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대공황 때 보호무역은 기껏해야 농산물과 공산품 수입을 억제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정도였다.

이런 조치들은 가뜩이나 위축된 글로벌 자본 이동을 더 어렵게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올해 민간자본 이동이 1650억 달러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역사상 최고치인 2007년 9290억 달러의 5분의 1도 안 된다. 외국 자본에 의지해 경제성장을 추진한 동유럽 등의 신흥 국가들이 가장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돈줄이 막히면 경제는 멈춰 서게 마련이다. 전문가들은 각국이 돈의 흐름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금융위기→경기 침체→교역 축소→자본이동 억제→소비·생산 더 악화→경제공황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뉴욕대 교수 등은 이런 상황을 ‘3차 위기’라고 불렀다. 집값 급락이 낳은 금융위기가 1차 위기라면, 그 파장으로 발생한 실물 경제 침체가 2차 위기이고 보호무역주의에서 비롯한 국제교역 축소가 3차 위기라는 것이다.

루비니 교수는 “자본 이동이 줄고 교역이 감소하면 세계 경제가 공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며 “세계 각국이 추진한 모든 경기 부양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고 경고했다.

1차 금융위기, 2차 실물 경제 위기에 이은 3차 교역 위기가 현실화될지는 불분명하다. 1·2차 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한 ‘닥터 둠’ 마크 파버 회장은 최근 미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각국 지도자들이 ‘면도날 위’에 서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정치 생명을 위협받기 때문에 그들이 소신을 버리고 보호무역 조치에 기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호주의를 막는 유일한 해법은 국제 공조다. 주요국이 경기 부양과 금융 구제를 동시에 추진하면 어떤 나라가 무임승차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굳이 외국에 대해 빗장을 걸어 잠글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제 공조의 핵심으로 미·중 협력을 꼽았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 최대 자본국인 중국이 협조해야 국제 공조의 물꼬가 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의 낭비벽을, 미국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을 비난하고 있다는 게 걸림돌이다. 그러나 결국 두 나라의 공조는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니얼 퍼거슨(경제사) 하버드대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 글에서 “두 나라가 (자신들이 생존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은 미국 시장에 물건을 팔아야 경기 침체를 막을 수 있고, 미국은 중국 자본을 유치해야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만큼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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