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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도] 59.앵포르멜 (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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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있어서 본격적인 추상미술은 50년대 후반의 앵포르멜 (Informel.비정형 미술운동)에서 출발한다.

앵포르멜을 태동한 50년대는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 (鮮展) 의 틀과 체제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國展)가 화단의 전부라고 해야 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국전은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작가들의 영향력이 커서 단순한 묘사 중심의 다소 경직된 아카데미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권위적인 국전의 아성에 젊은 작가들이 집단적으로 도전한 것이 바로 앵포르멜이다.

반 (反) 국전과 반 (反) 아카데미즘의 물꼬를 트면서 앵포르멜의 탄생을 예고한 것은 56년 서울 명동 동방문화회관 화랑에서 열린 '4인전'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작가들인 김영환 (金永煥).김충선 (金忠善).문우식 (文友植).박서보 (朴栖甫)가 '국전을 기반으로 하는 기성화단의 아집에 도전하는 개방적인 조형활동' 을 내건 반국전 선언을 발표하며 아카데미즘 미술의 본산인 국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냉전논리가 온 사회를 뒤덮고 있었던 분위기 속에서 미술교사 자리 하나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술활동을 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들은 국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술계 내의 재야세력을 결집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에 자극받아 57년 모던아트협회 (모던아트) 와 현대미술가협회 (현대미협) 등, 상투적인 아카데미즘 미술이 아닌 모더니즘을 표방한 단체들이 등장한 것이다.

모던아트와 현대미협은 모두 기성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전위적인 방법을 택했다.

다만 모던아트가 박고석 (朴古石) 과 이규상 (李揆祥).유영국 (劉永國).한묵 (韓默).황렴수 (黃廉秀) 등 40대 기성세대로 구성돼 온건한 방식으로 모더니즘을 전개했다면 현대미협은 김영환.김종휘 (金鍾輝).김창렬 (金昌烈).문우식.이철 (李哲).장성순 (張成旬).하인두 (河麟斗) 등 구시대 미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 참여, 도전의식이 좀더 투철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단체 가운데 앵포르멜의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현대미협. 현대미협의 역사가 곧 앵포르멜의 역사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현대미협은 앵포르멜을 주도해갔다.

61년 해체까지 불과 5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단체지만 이들의 활동은 구상미술 일변도의 우리 화단에 추상미술의 도입이란 한 획을 그었다.

창립전에 이은 2회 전람회에는 김서봉 (金瑞鳳) 과 김충선.나병재 (羅丙宰).박서보.이수헌 (李樹軒).이양로 (李亮魯).전상수 (全相秀).정건모 (鄭健謨).조동훈 (趙東薰).조용면 (趙鏞眠) 이 가세했다.

본격적으로 앵포르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이 대거 등장한 것은 58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4회 전람회. 이 전시에는 김서봉.김창렬.나병재.박서보.이명의 (李明儀).이양로.장성순.전상수.조동훈.하인두등이 출품, 두터운 질료 표현과 행위성이 강조된 대작들을 출품했다.

1백호는 소품 취급을 당할 정도로 큰 작품들이 선보였다.

이들 현대미협 작가 가운데서도 특히 박서보는 앵포르멜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자임했다.

다른이들보다 앞서서 이미 제3회 현대미협전에서부터 뚜렷한 앵포르멜 작품을 선보인 박서보는 '회화의 타락' 이라는 기성화단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젊은 작가들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앵포르멜의 열기로 이어가는 구심점이 됐다.

하지만 이같은 열기는 60년대에 접어들면서 형식적인 방법론으로 변질되어 갔다.

결국 6회전에 이어 덕수궁 미술관에서의 60년미협과의 연립전을 마지막으로 현대미협은 해체됐다.

60년미협은 김기동 (金基東).김대우 (金大愚).김봉태 (金鳳台) .김응찬 (金應贊).김종학 (金宗學).박재곤 (朴在坤).손찬성 (孫贊聖).송대현 (宋大賢).유영렬 (柳榮烈).윤명로 (尹明老).최관도 (崔寬道) 등 서울대와 홍익대의 졸업생과 재학생인 현대미협 후배세대들로 구성된 단체로, 60년 국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 돌담에 가두전시를 열어 젊은 패기를 뿜어냈다.

현대미협과의 연립전까지 열린데서도 알수있듯 이들의 작업정신은 현대미협을 계승했다.

현대미협의 활동과 함께 이 당시 현대미술운동에 큰 역할을 한 것은 57년 조선일보사가 개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이다.

초기에는 개별 작가단위로 초대하다가 나중에는 그룹단위로 초대하기도 했다.

현대작가초대전은 반보수적인 성향으로 새로운 조형의식을 지닌 작가들의 중심 활동무대였다.

여기서도 역시 현대미협이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63년 열린 7회전에서 일부 구상계열 작가까지 초대하는등 시간이 흐를수록 전위를 표방한 처음의 열기는 식어버린 인상을 주었다.

앵포르멜 미학을 내세운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이 해체된 후 이 두 단체 멤버들이 중심으로 62년 악티엘을 결성했다.

김대우.김봉태.김종학.김창렬.박서보.손찬성.윤명로.이양로.장성순.정상화 (鄭相和).조용익 (趙容翊).하인두등이 여기에 속한 작가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앵포르멜의 정신을 지속하고 현대미협.60년미협과의 회화적 동질성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악티엘 역시 64년 와해되고 65년 여기 속한 일부 작가들이 앵포르멜 이후를 모색한다는 열의로 다시 결속을 이룬다.

그것이 바로 65년 만들어진 신작가협회이다.

여기에는 김구림 (金丘林) 과 김상대 (金相大).손찬성.최관도.하인두등이 회원으로 포함돼 있었다.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앵포르멜 미학에 공감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작가는 강용운 (姜龍雲).권옥연.김병기 (金秉騏).김영주.김훈.양수아 (梁秀雅).이세득 (李世得).이수재.이일영.함대정 (咸大正) 등을 꼽을 수 있다.

60년대 중반에 이르자 미술대학 출신의 신진작가라면 누구나 앵포르멜 회화, 곧 추상미술을 추구할만큼 외형적 팽창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더이상의 새로운 양식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앵포르멜은 도전의식을 결여하면서 점차 기성화되어버린다. 앵포르멜이 국전을 바탕으로 한 기성 구상미술에 반기를 들었듯이 앵포르멜도 탈앵포르멜을 외치는 젊은 세대에게 도전을 받게 된다.

미술대학을 갓나온 신인 동인체인 무 (無).오리진.신전 (新展) 세 단체가 67년 청년작가연립전이라는 이름으로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작품을 공동발표하고 원형을 잃어버린 앵포르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앵포르멜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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