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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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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 해피 데이. 예약을 해 둔 장흥의 레스토랑에 당도했을 때는 오후 한 시가 좀 지나 있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레스토랑의 이름이 왠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내해 주는 예약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다툼질을 하듯 저마다 때깔을 자랑하는 주변의 녹음이 절로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연산홍과 철쭉, 벚꽃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마치 동화 속의 정원으로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들 정도였다.

예약을 하며 생일이라는 말을 해서인가, 테이블 위에는 자그마한 연분홍빛 생일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양초를 꽂기 위해서인듯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생일인 사람의 나이를 물었다.

그러자 하영이 방싯 웃으며 스물여섯요, 하고 대답했다.

곧이어 웨이터가 양초와 얼음이 채워진 아이스 패일, 두 개의 잔과 샴페인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거품을 뿜어올리지는 않되 코르크 마개는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스물여섯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 웨이터가 공손하게 하영에게 먼저 샴페인을 따라 주고 이어 나에게도 따라 주었다.

그런 뒤에 바비큐 스테이크를 주문 받고 몇 가지의 추천할 만한 소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멕시칸 살사 소스, 아메리칸 스테이크 소스, 이탈리안 소스, 마마 소스 따위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무엇이랴. 골치 아픈 형식 절차를 싫어하는 나의 입에서 예의 알아서 달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하영이 나머지 선택 과정을 해결해 주었다.

적어도 그녀는 나의 진화되거나 개량될 수 없는 고질적 기호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생일이라고 이런 곳가지 예약하시고………. 후, 고생스럽죠?" 샴페인 잔을 맞부딪치고 나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난 영원히 털보네와 짱구네 스타일이야. 오피스텔 밑에 그런 식당이라도 안 생겼다면 굶어 죽었을지도 몰라. 잘해봤자 오피스텔 일층에 있는 우동집이나 날마다 들락거렸겠지 뭐. " 피자, 햄버거, 핫도그 따위처럼 간편한 식사에 대해 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식성이 아니라 정서적인 이질감, 다시말해 익숙하지 않은 걸 싫어한다는 뜻일 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먹을 게 궁해진다면 나도 당연히 피자나 햄버거나 핫도그 같은 걸 먹을 수 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고,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고유의 기호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민첩하게, 세상 변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내 자신을 바꿔나가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바로 그런 점을 제가 좋아한다는 거 모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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