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출판계의 화두로 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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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0대 청소년들이 음란 비디오를 만들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성관계 장면을 직접 찍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받고 판매도 했다.

자신들의 몸이 '팔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어른들은 경악했다.

서울시내 여고생 10명중 한명이 거식증에 시달린다는 조사가 나왔다.

외국보다 5배나 높은 비율이다.

지난 4월엔 다이어트를 하던 가정주부가 목숨을 끊었다.

물론 날씬한 몸매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 '몸' 이 쏟아지고 있다.

매스컴.광고는 물론 문학.영화등 예술분야에서도 몸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일시에 풀려난듯 하다.

그만큼 경제적 여유가 생긴 탓일까. 출판계도 예외는 아니다.

몸을 둘러싼 논의를 반추하는 시도가 속속 전개되고 있다.

특히 학술잡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사회과학잡지인 '사회비평' (반년간.나남출판刊) 17호와 여성학 전문지인 '여성과 사회' (연간.창작과비평사) 8호가 각각 몸을 특집기획으로 다루며 본격 토론의 장 (場) 을 마련했다.

몸에 대한 과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그 공과 (功過) 를 냉정히 따져보자는 취지. 두 잡지엔 각각 5편의 논문이 실렸다.

모두 최근의 '몸열풍' 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사회비평' 특집의 제목은 '몸의 정치학' .주로 현대 소비문명의 역기능으로서의 몸을 해부했다.

특히 아름다운 몸 만들기의 이면에 숨겨진 모순과 문제점을 꼬집고 있다.

예컨대 가톨릭대 이영자 (사회학) 교수는 "몸에 대한 관심은 가부장문화와 소비자본주의문화가 절묘하게 결합된 형태" 라고 지적한다.

여성들의 몸 가꾸기는 남성들이 설정한 기준에 자기를 꿰맞추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 각종 매체에서 뱉어내는 늘씬한 몸매에 대한 환상도 도마에 오른다.

이밖에 광고.패션.스타산업등 사람들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오히려 옥죄게 하는 폐단들이 집중 거론된다.

큰 키와 군살 없는 신체, 세련된 치장등으로 고민하는 현대 남성들의 '가련한' 처지도 언급된다.

다만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사이버공간 속에서의 육체에 대한 분석이 빠졌다는 점이 아쉽다.

'여성과 사회' 는 성폭력.임신.출산.낙태.다이어트.성관계등 구체적 상황을 거론하며 한국여성들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있다.

여성의 몸은 단순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남녀관계등 우리 사회의 권력구조가 집결된 장소라는 것이 기본 시각.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 는 근대사회의 형성원리인 '시민권' 의 개념을 빌어 여성들의 열악한 현실과 미비한 법체제등을 고발하는 것이 특징. 거식증과 비만문제를 다룬 한국영화 '301.302' 와 뚱뚱한 여성들에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을 희화화한 또다른 한국영화 '코르셋' 을 들며 몸 다듬기의 허상을 분석한 영화평론가 변재란씨의 글이 쉬운면서도 재미 있다.

문명을 주제로 이달 창간된 인문과학잡지 '신인문' (반년간.한길사) 도 다음번 특집으로 몸을 다룰 예정이다.

몸 하나를 체계 있게 조명한 단행본은 아직 빈약한 편. 대중문화 비평서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책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다이어트의 부작용을 경고한 정신과의사 김준기의 '먹고 싶다, 그러나 마르고 싶다' (푸른숲) 정도. 번역서로는 소비문명의 이면을 들추어낸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가 입문서로 제격. '여자의 육체, 남자의 시선' (J 카우프만 지음.한국경제신문사) 은 가부장적 권력에 굴복한 여성들의 주체성 상실을 짚었다.

프랑스작가 주느비에브 브리작의 '난 아무 것도 먹고싶지 않아' (황금가지) 는 거식증 소녀의 열병을 소설로 옮긴 경우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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