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북한 동향이 수상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가위 23분간의 전쟁이라 할만했다.

기관총 수백발이 날고, 박격포에 곡사포까지 동원되는 치열한 전투였다.

우발적 충돌인가, 명백한 북 (北) 의 도발인가.

우리는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번 비무장지대 총격전은 명백한 북의 도발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14명의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정전협정위반이다.

유엔사령부 교전수칙에 따르면 경고방송에 이어 곧바로 사격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러나 우리측은 공중에 경고사격만 했다.

그런데도 계속 이들은 남하했고 곧이어 북의 조준사격이 시작됐다.

여기에 전방지휘소 아닌 후방부대에서 쏘았으리라 짐작되는 곡사포까지 동원됐다.

곡사화기는 우발적 충돌에 경고용으로 동원할 수 없는 전투용의 강력 무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군사분계선 침투에서 응사까지가 사전계획된 도발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작은 충돌이 큰 전쟁으로 확대되는 법이다.

만약 우리측마저 곡사포나 더 강한 무기를 사용했다면 이게 바로 사단급 전투로 이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사정으로 봐선 북한이 무력도발을 할 어떤 명분도 이유도 없다.

강릉 잠수함사건이래 경색된 남북관계가 점차 유화국면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북의 식량난을 돕기 위한 2차 지원이 끝났고, 곧이어 4자회담 예비회담이 열릴 예정이며, 경수로건설을 위한 기자재실험수송선이 바로 그날 북으로 떠난 날이다.

그런데 휴전선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했다면 그들의 저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휴전선 무력도발뿐 아니다.

황장엽 (黃長燁) 씨 망명이후 그를 암살하려는 암살팀이 남파돼 있다는 보도는 더욱 남북관계를 살벌하게 몰고 갈 조짐을 예고하고 있다.

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명백한 망명을 두고서도 그의 발언이 기분 나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암살을 기도한다는게 합당한가.

테러국가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아직은 첩보의 단계지만 북의 수상한 도발 자체가 이 모두를 가능한 진실로 받아들이게끔 만든다.

수상한 조짐은 또 있다.

북한이 구호식량으로 받은 옥수수 1천여을 되팔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만경봉호가 일본 아오모리항에 입항해 옥수수를 하역했다는 일본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동포애의 뜨거운가슴으로 북에 전달된게 우리의 옥수수 지원이었다.

이게 만약 보도대로 제3국에 되팔려나간다면 북은 동포애를 기만한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여기서 명백한 입장표명을 해야 한다.

먼저 비무장지대 침범을 '남측이 무장도발해 인민군들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는 식의 고식적 억지를 부릴게 아니라 떳떳이 군사정전위원회에 나와 잘못된 점을 분명히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다음, 황장엽씨 망명은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남북 모두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그 우려가 바로 엊그제 군사분계선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그를 암살하려 들지 말고 북의 적화통일노선을 바꾸는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북한의 식량난은 몇차례 옥수수 지원으로 해소되지 않을 일이다.

지속적 지원과 이 지원을 통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진실로 원한다면 옥수수 되팔기에 대한 일본 신문보도에 명백한 반론을 제시할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입장표명이 없다면 앞으로의 남쪽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고 더 이상의 대화나 협력도 불가능하다.

지금 북한은 매우 신경질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관측할 수 있다.

해결할 수 없는 식량난에 쫓기면서 김정일 (金正日) 체제의 새로운 출범을 맞고 있다.

남쪽 또한 황장엽씨의 북한 전쟁경고에 따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긴장된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돌발사고가 생길 경우 상황은 급전직하의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섣부른 집적거림으로 전선을 긴장시키지 말고 수상한 행동으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북한의 입장변화와 우리측의 단호하지만 적정한 수준의 대응이 요구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