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99> 차이어와 위안스카이의 은원<上>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1915년 겨울 호국군 장군들과 함께한 차이어(蔡鍔·가운데). 김명호 제공

차이어(蔡鍔)는 16세 때 2원을 들고 고향을 떠났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무일푼이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1000원을 빌려 일본 유학을 떠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년이 어떻게 북양신군을 지휘하던 위안스카이를 만났는지는 추측조차 불가능하다. 학비로 300원을 지출했고 나머지 돈은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공공자금으로 썼다. 혼자일 때는 걸어만 다녔다. 매식(買食)이나 군것질도 하지 않았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중국 사관 3걸(中國士官三傑)’ 중 으뜸”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볼이 빨개지곤 했다. 그의 폐가 나쁜 줄 주변 사람들은 몰랐다. 귀국 후 6년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신군을 훈련시켰다. 가는 곳마다 ‘적토마’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 사이 위안스카이는 직례총독·북양대신을 거쳐 군기대신으로 개혁을 주도했다.

차이어는 1911년 7월 윈난(雲南) 총독의 초청으로 서남지역에 첫발을 디뎠다. 신군의 훈련을 일임받았다. 신해혁명이 폭발하자 윈난의 관병들은 차이어를 군정부 도독에 추대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부하였던 주더(朱德)는 후일 차이어를 이렇게 회상하곤 했다. “체력이 약했고 항상 창백했다. 말수가 적고 조용했으며 몸가짐은 장중했다. 얼굴은 말랐고 뺨은 여성스러웠다. 그러나 꽉 다문 입 언저리에 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예리한 보검과 같았다.” 차이는 주변 4개 성(省)과 5성 연합을 결성했다.

서태후 사망 후 쫓겨났던 위안스카이도 총리대신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듬해 1월 쑨원(孫文)이 난징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자 위안은 공화제를 지지하며 황제를 퇴위시켰다. 난징의 참의원은 선거를 통해 위안을 임시 대총통에 선출했지만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내각제를 실시한다는 임시약법을 통과시켰다. 차이는 공화제를 수용한 위안을 지지했다. “강한 정부와 중앙집권만이 외환을 막을 수 있다. 적임자는 위안스카이밖에 없다”는 전문을 쑨원과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1913년 2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선거에서 국민당은 승리했다. 내각총리는 국민당 이사장 쑹자오런(宋敎仁)의 몫이었지만 쑹은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위안스카이의 사주라고 단언한 쑨원은 무력을 동원한 2차 혁명을 선언했다.

차이는 암살이라는 비열한 수단을 비난했지만 군대 동원에는 반대했다. “쑹자오런은 남북의 조화를 위해 애썼다. 자신의 죽음으로 관계가 악화된다면 구천지하에서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모든 문제는 법정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윈난에 인접한 성의 도독들에게도 “총통이 모반행위를 했다면 참의원의 탄핵을 받아야 한다. 군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는 전문을 발송했다. 위안스카이에게도 “훈장을 남발하는 것은 동포의 살상을 장려하는 행위”라며 쓸데없는 포상행위의 중지를 요구했다. 동향 친구가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하려 할 테니 두고 보라며 약 올렸다. “그러면 나도 서남에서 황제를 칭하겠다”며 웃었다. 그는 부패한 관료세력과 저질들로 구성된 난폭한 세력이 중국의 수준을 떨어트린다는 량치차오(梁啓超)의 말에 공감했다. 쑨원을 후자로 단정했다.

위안스카이는 차이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지방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나머지 병권을 탈취하기 위해서였다고들 하지만 위안은 군사가들을 중요시했고 사람 보는 눈이 비범했다. 차이를 무서워하면서도 편애했다. 참모총장이건 육군총장이건 뭐든지 시키려 했다. 북양 원로들이 반대했지만 가장 높은 계급을 수여했다. 1915년 여름부터 위안을 황제에 추대하기 위한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이는 어떤 정견도 발표하지 않았다. 환락가를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창기들과 어울렸다. 몇 개월 후 호국군을 설립해 위안스카이의 무덤을 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