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만든 책은 가장 편리한 형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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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05면

15세기 구텐베르크가 펴낸 『42행 성서』는 당시 180부가 간행돼 48부가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최근 한정으로 다시 만든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특히 모리스가 켐스콧 프레스에서 펴낸 책들은 전시용 유리장 안에 보관 중이다. 제습제를 넣어둔 것은 물론이고 햇빛을 막기 위해 유리장 위에 천을 덮어 두었다. 모리스의 철학과 제작 방식은 대량생산과 거리가 멀다. 발간 당시에도 종별로 대개 250부 안팎밖에 찍지 않았던 희귀본들이다. 몇 해 전 영국의 수집가가 53종 66권의 전질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김 대표는 무리를 해 한꺼번에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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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에 대한 평등주의가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실용적 세일즈 기법을 다룬 책과 심오한 인문주의를 담은 책을 같은 기준으로 평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내용만 아니라 형식도 마찬가지다. “200만원짜리 책도 있고, 200원짜리 책도 있을 수 있다”면서 “이런 다양성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나온다”고 말했다.

사실 책이 대중적 상품이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중세까지 책을 소유한다는 건 문자를 읽는 능력은 물론이고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만 가능했다.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는 서양의 중세를 두고 “당시 책은 대개가 왕후·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의 주문을 받아 수도원의 사본실에서 한두 부, 기껏해야 다섯 부를 넘지 않게 만든, 따라서 호화 희귀본이게 마련이었다”고 소개한다. 저서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 실린 내용이다. 1450년대에 활판인쇄술이 발명된 건 그래서 정보 유통의 대혁명이었다. 구텐베르크가 당시 4년여에 걸쳐 완성한 『42행 성서』의 발행부수는 180부였다.

김언호 대표

김언호 대표는 원본 그대로 최근 한정본(690부)으로 만든 『42행 성서』도 소장하고 있다. 책장 깊숙이 두꺼운 천으로 감싸 보관 중이던 것을 꺼내 보여 줬다. 각각 300쪽이 넘는 구약과 신약 두 권 모두 수년치 신문을 쌓은 듯 거대한 부피다. 사용된 종이는 흔히 볼 수 없는 두꺼운 종류다. 지금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각 쪽을 두 단으로 나눴고, 한 단이 42행이라서다. 본문의 활자가 우아하고 화려하다. 여백에는 장식적인 채색 그림이 곳곳에서 빛난다. 역시나 아름답다. 당시로는 ‘대량생산’이었겠지만, 책이라는 게 얼마나 귀하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현대의 복사본은 컬러인쇄로 그림에 색을 입혔다. 김 대표는 “과거에는 흑백으로 인쇄한 뒤 한 장 한 장 사람 손으로 채색을 입혔다”고 설명한다. 이런 전통을 다시 살려 요즘 책 중에 삽화를 판화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옛것과 새것은 끊임없이 소통한다. 김 대표는 “디지털 시대가 아날로그와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며 “종이로 만든 책은 지금도 인간이 발명한 가장 편리한 형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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