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봉급쟁이 각박한 삶, 오아시스 같던 월급날이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줄을 서서 월급봉투를 받던 광경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직장이 계좌 이체를 통해 월급을 지급하지만, 아직도 일부 기업에서는 현금 지급을 고수한다. 노동의 대가가 고스란히 지폐의 촉감으로 다가오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꺼내보았다.

관련사진

2005년 <평화신문>은 가족 내 위상을 높여준다는 의미에서 급료를 현찰로 월급봉투에 담아 지급했다.

자장면 한 그릇이 100원을 넘지 않던 시절 직장인들의 이야기다. 매월 25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단조로운 회사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들뜨기 시작한다. 연신 싱글벙글인 사람, 기지개를 펴거나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사람, 무엇인가를 열심히 계산하는 사람….

부장이 나눠주던 월급봉투의 무게… 두툼한 만큼 든든해지던 마음들
월급봉투의 추억
별난페이지

그러다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면 사무실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우르르 출납과로 향했다. 북적대던 직원들 무리가 대충 두 줄로 정돈되면 출납과 직원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손에서 손으로 순서대로 건네지는 월급봉투, 그 두툼한 무게에 마음 가득 뿌듯한 감정이 차 올랐다.

월급 명세 내역이 빼곡히 적힌 봉투 속에는 1만 원짜리와 1,000원짜리 지폐, 그리고 동전 몇 개가 고루 들어 있었다. 어떤 직장에서는 부장이 직접 봉투 다발을 관할 부서에서 받아와 부서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해주기도 했다.

“이번 달 수고 많았네.”

어깨를 툭툭 치며 건네주던 봉투는 평소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한 달 동안의 수고와 노력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가족의 삶과 미래가 이 봉급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는 생각을 하면 스스로 대견해지기까지 하는 순간이었다.

아내 몰래 벌이던 ‘봉투위조작전’

관련사진

각자가 자리에 앉아 오후의 남은 업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흥분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밀린 외상 술값을 어떻게 아내 몰래 갚지?’ ‘가불한 몫은 어떻게 감춰야 하나?’ ‘이번에는 새로 가전제품을 하나 장만해 볼까?’ 상념은 무럭무럭 피어 오른다.
사실 월급쟁이 봉급이야 뻔하다.

소소한 빚을 갚고 살림할 생활비를 내놓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몫. 그래도 월급날이 왔다고 친구들에게 한턱 내고, 비자금도 슬쩍 챙겼다.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쥐어주며 잔뜩 호기를 부리노라면 받아들던 아내도 애교 어린 눈웃음으로 답하고는 했다. 이제 다시는 우리 사회에서 보지 못할 풍경, 정년을 목전에 둔 샐러리맨들만이 떠올리는 옛 추억이다.

1990년을 전후해 직장에서 월급봉투가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벌써 20여 년 전의 유물이 돼버렸다. 요즘 30대 이하는 명세 내역이 적혀 나오던 월급봉투를 구경해보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다. 직장인이라고는 해도 20~30대 초년병들은 모두 자기 봉급의 촉감을 느껴보지 못한 세대인 셈이다.

부른다고 돌아올 것도 아닌데, 지금의 50대 샐러리맨들은 월급봉투의 추억에 미련이 많다. “통장으로 월급을 쏴주기 시작한 이후 경제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하소연에 동조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일용할 양식을 집으로 가져가는 뿌듯함은 언제 떠올려봐도 달달한 추억이다.

“내역이 쫙 적혀 있는 원래의 봉투 대신 따로 흰 봉투를 준비했어요. 일필휘지로 ‘금 얼마’ 이렇게 직접 붓글씨로 겉봉에 쓰고 돈을 넣어 아내에게 줬지요. 일부러 딸아이 보는 앞에서 ‘봉투 전달식’을 하기도 했고요. 심지어 월급봉투가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월급을 현찰로 뽑아 봉투에 넣어 주고는 했습니다.”

한 직장에서 만 24년간 일해온 이병무 GS칼텍스 상무의 말이다. ‘일금 317,800원.’ 이 상무의 가슴에 광개토대왕릉비처럼 꽉 박혀 있는 숫자다. 바로 첫 월급봉투에 적혀 있던 액수다. 당시 회사(옛 호남정유)는 대우가 좋은 편이어서 봉급이 비교적 많았다. 처음 월급봉투를 받아 품 속에 챙기는데 제법 묵직했단다.

관련사진

photo

1990년대의 인기 드라마 <손자병법>. 직장인들의 삶과 애환을 다뤘다.

“이 봉급을 받으며 내가 기여한 것이 뭐가 있나?” 하는 생각에 괜히 주눅이 들던 햇병아리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그러나 월급봉투가 모든 사람들에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내에게 명세 내역을 속여야만 하는 비운의 사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몰래 대출받아 원천징수 당하는 사람, 집안 식구 경조사 비용을 몰래 지출한 사람, 형편 어려운 친구에게 슬쩍 빌려준 사람 등….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 월급날은 남몰래 쓸쓸해진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빈 봉투/ 한숨으로 봉투 속을 채워나 볼까?/ 외상 술을 마시면서 큰소리치고/ 월급날은 나 혼자 가슴을 친다/ 요리조리 빼앗기면 남는 건 빈 봉투/ 어떡하면 집사람을 위로해줄까?”가수 최희준의 노래 <월급봉투>의 가사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때는 슬쩍 가불해 쓰는 경우도 있었다. 자칫하면 정말 텅 빈 봉투를 가져다 주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의 허탈하고 비참한 심경은 또 어땠을까? 노래 가사만 읊어봐도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아내 몰래 월급을 쓴 것을 감추기 위해 당시 샐러리맨들은 머리를 쥐어짰다.

명세 내역을 손으로 쓰던 시절에는 경리과 여직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기도 했다. 손으로 쓴 글씨는 고치기는 쉽지만 필체가 다르면 금세 들통이 나기 때문에 경리과 여직원에게 슬쩍 ‘위조’를 의뢰한 것이다.

“월급 쓸 것 다 쓰고 집에 가봐야 마누라한테 깨질 것이 뻔한데…. 아마 내 동년배 남자들치고 월급봉투 위조 한번 안 한 사람 없을 걸요?”

안규문 밀레코리아 대표의 회고담이다. 안 대표는 ㈜쌍용 종합무역상사에 입사해 25년간 일했다. 월급사장인 그는 “올해로 33년째 월급쟁이를 하고 있으니 33호봉”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숫자 몇 개 고치는 작업이야 쉽지만 대형사고를 친 사람들은 아예 봉투 하나를 새로 구해야 했어요. 회사에서 만든 봉투에는 ‘㈜쌍용 급여명세표’ 이렇게 로고가 다 들어있거든요. 시중에서 따로 살 수도 없으니 봉투 자체를 위조하는 수밖에요. 당시 사옥이 충무로 근처여서 인쇄소에서 월급봉투 몇 장을 구해 오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끝내줬습니다.”

샐러리맨의 ‘봉투와의 전쟁’ 이면에는 각자의 사정이 숨어 있었다. 이 상무는 월급쟁이인 동시에 한 집안의 종손이다. 일가친척에게 경조사라도 생기면 종손으로서 앞장서서 챙겨야 하는 입장이었다. 돈을 내도 다른 친척들보다 더 내다 보니 자연히 아내에게는 지출 내역을 감추고 싶어지게 됐다고 한다.

“아내도 이해해주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지출에 관해 공유할 수 없는 부분도 생기더군요.”

소매치기와 월급날

일단 샐러리맨들이 월급봉투를 받아 들면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돈이 없으면 신용카드로 긁고 마는 요즘과 달리, 그때는 회사 근처 몇 군데 술집에 밀린 술값이 달려있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어떤 주인은 월급날 회사 출입구에서 ‘봉쇄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안 대표의 말.

“그래도 그때 술집 주인들은 비교적 인정이 있었어요. 재정적으로 너무 쪼들리는 달에는 술값 갚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거든요. ‘아이, 이 달에는 없어, 다음에 갚을게’ 하면 ‘다음달에는 꼭 줘’ 하고 그냥 웃으며 넘어가기도 했죠.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집까지 무사히 수송해 가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었어요.”

그때는 무슨 소매치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품 속에 목돈을 넣고 만원버스에서 시달리다 보면 월급봉투를 통째로 도난당하는 황당한 경우도 가끔 생겼다. 월급날에는 직원들이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면서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이 정해진 인사일 정도였다. 차라리 도둑맞았으면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데라도 있다.

으레 월급날이면 동료 직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식당이나 선술집으로 몰려가게 된다. 한 사람이 호탕하게 “1차는 내가 쏜다!”고 외치면, 이에 질세라 “2차는 내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흥에 겨워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보면 몽롱한 정신에 가방이나 겉옷을 두고 오거나 귀중한 봉투를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고는 했다.

월급봉투를 간수해야 한다는 걱정에 아내들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남편이 곧장 집으로 귀가하게끔 만들었다. 푸짐한 저녁상에 술상까지 봐주겠다고 꼬드기는 ‘애교형’에서부터 이 날만은 특별히 택시 승차를 허용하는 ‘스피드형’, 술집 주인과 함께 출입구에서 지키고 서 있는 ‘공포형’까지….

사연도 많고 탈도 많은 월급날이지만 어쨌든 한 달을 꼬박 일한 삯을 빠짐없이 받아 챙겼기에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넉넉한 하루였다. 봉급날 전에는 극도로 빈곤한 ‘월급고개’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가뭄에 단비처럼 귀한 ‘봉투님’이었다. 샐러리맨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요, 삶의 낙이기도 했던 월급봉투는 어느 날 갑자기 눈 녹듯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은행이 온라인 전산 시스템을 갖추면서 근로자의 통장으로 자동이체해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회사가 1990년을 전후해 월급봉투를 없앴다. 봉투가 없어지자 월급쟁이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월급을 바로 통장으로 넣어주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가장의 권위마저 잃었다”고 토로하는 샐러리맨이 많다.

은행에서 10원 한 장까지 틀리지 않고 고스란히 통장으로 넣어 주지만, 직장인들은 자신이 한 달간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을 구경도 못하고 모두 부인에게 넘겨주는 셈이 되고 만 것이다. 혹자는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부인에게 용돈을 타 쓰는 입장이 되니 비참한 심경까지 느꼈다고 고백한다

살림을 하는 사람이 주로 여성이었으니 저축과 생활비 지출 등은 아내의 몫인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시대가 변해 통장으로 월급이 바로 이체되니 가장인 직장인은 손을 써볼 도리도 없이 가계의 경제적 전권을 부인에게 위임하게 된 것이다. . 다시 이 상무의 말.

“예전에 우리 부모님 세대를 되돌아보면 확실히 경제권은 월급봉투를 쥔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여성의 목소리가 작기도 했거니와 아버지가 월급을 마음대로 써도 뭐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아버지 월급이 얼마인지 늘 모르셨던 기억이 납니다.”

1980년대 이후 봉급 지불 체계의 변화로 가장인 샐러리맨의 권위와 위상이 예전만 못하게 됐다. 월급봉투는 봉투일 뿐, 단순히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지만, 그 이상의 막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샐러리맨 가장들이 고개를 숙인 반면 여성들은 막강한 경제주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계의 소비력이 가정주부에게 이임됐기 때문에 기업도 여성의 파워에 주목하게 됐다. 안규문 대표는 해외 주재원 시절 미국에서 몇 년간 체류하며 한국 여성의 경제적 권한의 막강함을 실감했다.

“아내가 미국에서 살아보더니 ‘한국 여자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한번은 미국인 전업주부 친구와 대화하다 ‘남편이 용돈을 올려달라는데 월급이 그대로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놨답니다. 그 친구가 깜짝 놀라며 ‘집에서 살림하는 네가 남편 용돈을 주느냐’고 묻더랍니다. 미국인들은 돈 버는 사람이 집에 있는 사람에게 용돈을 주는 모양이더군요.”

경제권 잃고 고개 숙인 남편

남자들의 숨겨진 힘이던 비자금 마련도 어렵게 됐다. 경제가 한창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들의 보너스가 기본급 대비 연 400~600%에 달했다. 말 안 하고 ‘삥땅’을 치면 봉급체계를 모르는 아내는 영영 모르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호탕하게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아내에게 슬쩍 값비싼 선물을 건네보기도 했다.

“어디 근사한 데 가서 실컷 먹고 오자고!”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당당하게 외식비를 치르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과급을 포함해 회사가 근로자에게 지불하는 모든 돈이 하나의 통장으로 이체되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살림을 돌보는 아내들이 허튼 곳에 돈을 쓸 리는 없다. 가계를 돌보는 사람이 집안 경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순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단지 그때의 노란 월급봉투, 두툼하고 묵직하던 지폐다발의 추억 앞에서 많은 중년의 샐러리맨이 회한에 잠기는 것이다. 당시 한국경제는 무서운 줄 모르고 급성장하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그리고 다시는 겪을 수 없을 것 같은 호황을 누렸다. 열정과 패기를 품고 일터로 나서던 그 시절, 월급봉투를 두고 소란을 떨고 호기를 부리던 그 시절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기에 더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아닐까?

박미소 기자 smile83@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