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이리 갈까 저리 갈까 … 갈 곳 못 찾은 돈 540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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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 들어 증권사 법인영업부엔 초단기 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에 돈을 넣겠다는 은행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고객에게서 받은 예금을 대출해 이익을 내는 은행이 증권사가 파는 MMF에 가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엔 은행들이 위험성이 큰 대출을 기피하면서 하루만 맡겨도 연 3~4% 이상의 금리를 주는 MMF로 돈을 몰아넣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김세환 금융상품법인영업부장은 “1000억원· 2000억원 단위로 주문이 오고 있지만 다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며 “MMF를 굴리는 운용사에 몇백억원 정도라도 여유가 생기면 모든 증권사가 이를 확보하기 위해 달려든다”고 말했다.

#2. 5일 오후 2시 한국은행이 실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에는 은행들이 32조2300억원어치를 사겠다고 응찰했다. 이는 일주일에 연 2.5%의 금리를 준다.

은행에는 가장 안전하게 돈을 굴릴 수 있는 길이다. 한은은 16조원어치만 팔겠다고 했지만 은행들이 사겠다는 규모는 두 배가 넘었다. 그만큼 은행들이 갖고 있는 여유자금이 많다는 뜻이다. 지난달 9일 실시된 RP 매각에선 80조원의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한은 시장운영팀 임형준 차장은 “아직 은행들이 돈을 굴릴 곳을 마땅히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시중에 떠도는 단기자금이 500조원을 훌쩍 넘었다.

5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은행의 수시입출금식 예금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243조7000억원이다. 양도성예금증서(CD)나 RP 등 만기가 주로 1년 이내인 단기 시장성 수신상품 잔액은 125조5000억원으로 집계됐다.

또 증권사가 판매하는 단기 상품인 MMF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MMF는 3일에만 2조673억원이 들어오면서 전체 설정 액수가 110조4720억원으로 불어났다. 지난달 8일 사상 처음으로 100조원을 넘어선 지 1개월도 못 돼 10조원이 늘었다. 2007년 말 이후로만 60조원이 증가한 것이다.

여기에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설정액 34조원과 단기채권형펀드 가입액 27조원까지 합치면 전체 단기자금 규모는 540조원에 달한다. 2007년 말의 460조원보다 80조원이 늘어난 것이다.


자금 사정이 넉넉한 기업들도 불확실한 투자를 하기보다 단기 상품에 돈을 넣고 있다. 기업이나 가계에 자금을 공급해야 할 은행도 MMF에 돈을 못 넣어 안달이다. 전체 MMF 가입 자금 중 68%인 75조원가량이 은행과 기업이 맡긴 법인 자금이다.

이는 2007년 말(15조5000억원)의 네 배가 넘는다. 한은이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었지만 정작 필요한 곳으로 돈이 흘러가기보다 부동자금으로 변해 금리가 높은 곳을 찾아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올 들어 연체율이 크게 높아져 은행의 건전성이 나빠지고 있다”며 “이 상태에선 대출을 늘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은행이 대출을 해 연체가 되면 충당금을 쌓아야 하므로 이익이 줄어든다. 또 돈을 빌려주면 위험 자산이 늘어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진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은행이 대출을 확대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기업이 우량하고 부실한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라며 “구조조정을 서둘러 불확실성을 없애야만 필요한 곳으로 돈이 흘러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은이 푼 자금이 은행에서만 맴돌면 돈을 풀어도 소비나 투자를 촉진할 수 없다. 또 시중자금이 높은 금리를 좇아 단기 부동화하면 뜻하지 않은 악재나 쏠림 현상이 나타났을 때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수도 있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한은이 돈을 계속 풀어도 단기 부동자금만 늘릴 공산이 크다”며 “앞으로 경기가 회복되는 상황에서 부동산 등 자산 시장이 소용돌이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배·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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