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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선율 속에서 집시처럼 들떴던 세비야의 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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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15면

세비야 중앙 광장에서는 매일 플라멩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우리 부부가 바르셀로나의 한 민박집에 묵었을 때 이곳에서 20년 이상 체류한 60대 주인 아저씨는 대뜸 도인처럼 말했다. “삶의 질은 이곳에서 찾으면 안 되지. 세비야로 가 봐.”

‘서른셋, 서른넷’ 부부의 유럽 여행기

나는 순간, 뭉근하게 떨려 오는 심장 박동 소리를 느꼈다.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는 가우디의 화려한 건축물, 그라나다의 자랑인 알람브라 궁전에서도 삶의 질은 도통 찾아볼 수 없었기에 설렘은 더했다. 삶의 질이라…. 우리는 순진하게 그 말을 무턱대고 믿어 보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그라나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세비야는 플라멩코와 카르멘을 낳은 집시의 도시다. 지리적으로는 스페인 남부에 위치해 있어 뜨거운 햇살을 벗 삼아 한껏 늘어질 수 있고, 물가도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싼 편이다. 덕분에 해물볶음밥인 파에야와 ‘핏빛 술’이라는 이름을 가진 와인 칵테일 상그리아를 양껏(?) 즐기며 모처럼 신났다.

주인 아저씨의 말은 옳았다. 저녁이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도시 세비야는 ‘쉬는 것이 전부’인, 이를테면 한국의 제주도 같은 스페인의 대표적 휴양지다. 길고 울창한 야자수가 광활한 광장에 줄지어 서 있고, 자동차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이따금 트램(전차)이 자전거 속도로 사람들을 실어 나를 뿐. 여유로움이 반드시 관광객들만의 차지는 아니었다. 일반 상점의 직원은 손님이 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니면 말고!’라는 식이다.

오후 1시30분이 되면 시에스타(낮잠 풍습)가 시행되므로 4시까지는 쇼핑은 물론 닫힌 쇼윈도 덕분에 아이쇼핑도 못 한다. 음식점은 점심 영업 후 ‘한숨’ 자고 오후 8시30분에 다시 문을 열기 때문에 그전에는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한다. 어디를 가든 24시간 풀가동되는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우리로서는 세비야는 여러모로 불편한 도시였지만 그 여유와 배짱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느긋한 광경을 두고 주인 아저씨가 ‘삶의 질’을 운운했을 것이다.

스페인어를 전공한 데다 월드뮤직 CD를 ‘준음악평론가’만큼 소유하고 있는 남편에게 세비야는 천국이었다. 중앙 광장에서는 플라멩코 거리 공연이 매일 벌어졌고, 저녁이 되면 거리의 악사들이 하나 둘씩 광장을 메웠다.

하루는 쿠바에서 건너온 혼성 3인조 밴드가 길가에 앉아 봉고를 두들기며 달빛 아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꼭 동네 산책 나온 사람들 같았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한 장면처럼. 남편은 순박한 연주에 매료돼 급기야 그들이 만든 가내 수공업 CD를 샀다. 우리는 그들의 노곤한 연주를 들으며 아이처럼 쌔근쌔근 깊은 잠에 들곤 했다. 세비야의 하루는 그렇게 여유로 시작해 여유로 끝났다. 그리고 이것이 지면을 통한 우리 여행의 마지막이다.

햄버거 하나를 나눠 먹으면서 고환율과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였던 여행. 각자 50㎏이 넘는 짐을 끌고 다니면서 ‘퇴직금 날려 가면서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를 하루에도 열 번씩 반문했던 여행. 24시간 붙어 다니느라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수도 없이 찍었던 유럽 여행. 우리가 정말 이 고단한 여행을 사랑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는 점이다. 남편은 이제 내게 사과를 닦아 먹으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나는 남편에게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그냥 봐주기로 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아내 아임(I’m)과 완전 소심하고 꼼꼼한 남편 이미리(2㎜)씨. 너무 다른 성격의 서른셋, 서른네 살 부부가 연재하는 ‘좌충우돌 부부 유럽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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