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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찾아서>32.조주 柏林禪寺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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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라(放下着)

묻는다:이렇게 빈 손으로 왔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답한다:그러면 땅에 내려놔라(放下着)!

묻는다: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얼 내려놓으라 하십니까.

답한다:그렇다면 계속해 들고 있거라!

조주종심선사(778∼897)와 한 중의 선문답이다. 화두로는 ‘방하착’이라 한다.

얼른 보기엔 말장난 같다. 그러나 이 한마디 속에는 엄청난 소식이 담겨 있다. 원래 선문답은 일상의 구어체와 비속어까지도 마구 쓰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심오한 철학적 냄새가 전혀 안난다.

요사이 인기높은 KBS-1TV 사극 ‘용의 눈물’에서 무학대사(박병호 분)가 ‘왕자의 난’에 절망한 태조 이성계를 위문,설득하는데 ‘만법귀일(萬法歸一)’ ‘방하착’이라는 2개의 조주선사 화두를 빌려 태조의 분노를 진정시켰다.

무학대사는 정안대군 이방원이 피바다를 만든 쿠데타에 패륜적 배신감과 인생무상의 허탈감을 느끼며 흥분하는 태조에게 화두 ‘만법귀일’을 예시,피를 본 조선조 건국 혁명의 인과응보라고 설했다.

화두 ‘방하착’으로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집어던지는 단념을 통해 더이상 옥좌나 세자의 비참한 죽음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간곡히 충언했다. 결과는 태조가 방원의 쿠데타를 묵인하고 흥천사로 내려갔고 공주는 불문에 출가,비구니가 됐다.

결과적으로 무학대사가 들어 보인 2개의 화두속에 함축된 선리(禪理)는 인간 이성계의 심성을 감동시켜 역사의 한 고비를 정리해주었다.

선림(禪林)의 화두가 이제는 이처럼 TV연속극에까지 등장,깊은 감명을 주는등 일상생활에 접근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 이유는 불교라는 일개 종교차원이 아니라 ‘선사상’이 21세기 이후 새로운 세계문명 창조의 인류 보편사상·대안사상(代案思想)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한국불교는 신라말·고려초 9개의 선종사찰(九山禪門)이 문을 연 이래 선종이 주축을 이뤄온 자타 공인의 선불교다.

그러나 ‘용의 눈물’에 등장하는 선가의 화두를 시청하면서 반가운 한편 아쉬움이 없지도 않다. 문제는 화두가 뜻하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적절히 쓰고 있느냐는 점이다.

우선 결론부터 말한다면 ‘방하착’이라는 화두는 적절히 구사됐다. 그러나 ‘만법귀일’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인과응보설을 설명한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중은 조주에게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공심(空心)의 해탈을 성취했다고 뻐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는 한 생각,즉 해탈에의 집착이 있지 않은가.

진정한 해탈은 공(空)이라는 발판마저도 차버리고 전신을 바닥 없는 심연으로 집어던질 때 비로소 성취된다. 마음을 비웠다는 그 생각조차 없는 절대무(絶對無)라야 올바른 견성의 경지다.

조주가 “땅에 내려놔라”고 한 것은 바로 ‘아무 것도 가진게 없다’는 그 생각을 버리라는 얘기다. 중은 멍청하게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느냐고 반문한다.

조주는 그렇다면 가지고 가라고 핀잔한다. 정말로 딱한 일이다. 중이 열심히 찾고 있는 ‘해탈’이란 것이 바로 그 중 자신의 발 아래서 이처럼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슬픈 일인가!

조주는 “그럼 계속 들고 있거라”라는 한마디를 통해 관념적인 허무주의 철학이 무의미함을 일깨우고 있다.

부처는 그가 더이상 부처임을 고집하지 않을때 비로소 현현한다. 즉 부처이기 위해서는 부처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선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고래로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고,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必生死也 必死生也)’고 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대통령이 되려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선이 목표하는 절대자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는 생각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런 선화(禪話)도 있다.

묻는다:너는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

唯識)을 아는가.

답한다:물론 알고 있습니다.

묻는다:(뜰앞 나무밑의 바위를 가리키며) 저

바위가 네 마음속에 있느냐,아니면 마

음밖에 있느냐.

답한다:마음 안에 있습니다.

묻는다:무엇 때문에 그 무거운 바위를 마음속

에다 두고 있는가! 어서 내려놓아라.

답한다:(참문한 중은 여장을 푼후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선불교 5가7종중 법안종 개산조인 법안문익(885∼958)이 나한계침선사를 참문한 선문답이다.

법안은 ‘나한암석(羅漢巖石)’이라는 화두가 된 이 선문답에서 크게 깨치고 선종의 한 종파를 개산한 대선장(大禪匠)이 됐다.

불법은 눈앞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는 선리를 마음과 바윗돌을 예시해 설파한 나한계침의 궁극적인 가르침 역시 ‘방하착’이 지향하는 목표와 똑같다 . 바위는 마음 안에도,밖에도 있는게 아니고 지금 있는 나무밑의 그 자리에 실존할 뿐이다.

일체의 정신적·물질적 욕심을 내는 중생심의 의식작용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절단중류(截斷衆流) 없이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무학대사가 설한 화두 ‘방하착’은 태조 이성계의 심금을 울려 권력(왕좌)과 금력, 세자에 대한 부정(父情)을 버리고 하야,함흥땅으로 낙향케 한다.

목욕탕에서처럼 벌거벗고 나면 대통령이란 자리도,재벌 회장이라는 이름도 한낱 잠시 태양을 가린 무명(無明)의 구름속 어리석은 탐욕이요,허상일 뿐이다.

시청자들은 옥좌를 쓸모없는 헌신짝처럼 집어던지고 확 비운 마음으로 떠나가는 이성계를 눈물겨운 연민의 정으로 동정하며 공감한다.

무학대사가 설한 화두 ‘방하착’은 오기와 대결의 살기가 등등한 오늘의 한국 정치판에 시사하는 바가 큰 사극의 한 장면이요,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인 인간 심지(心地)를 꿰뚫은 선가(禪家)의 사자후다.

그러나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만법귀일’로써 방원의 쿠데타가 피를 보았던 이성계의 지난날 건국혁명이 심어놓은 업인(業因)에 대한 삼세응보(三世應報)라고 설한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다.

인과응보의 불법 설명으로 이성계를 위안하려면 백장회해선사(749∼814)의 ‘들여우(百丈野狐)’라는 화두를 인용했어야 했다.

‘만법귀일’은 동양 전통사상의 하나인 만물일체(萬物一體), 본체와 현상이 종국적으로는 하나라는 체용일여(體用一如), 죽음과 삶이 한 뿌리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 )의 불이법(不二法)을 밝힌 선림 화두다.

차라리 이 화두는 이성계에게 모든 것을 단념하고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듯(葉落歸根)옥좌를 물러나 죽음이나 맞이하라는 뜻으로 써먹을 수는 있었다.

‘백장야호’는 저 옛날 백장사 방장이었다가 인과법칙을 묻는 학인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해 5백세(五百世)동안 여우의 몸이 된 한 노인을 다시 사람이 되게 한 백장선사의 인간구원 얘기다.

인과법칙은 분명하다. 인과법칙을 제대로 모르면서 허튼소리를 한 방장은 죽어서 여우로 환생했다. 백장은 그 여우를 인간으로 구원해주고 나서 말했다.

“인(因)과 과(果)는 어제도 오늘도 분명하니라! ” 이성계가 건국혁명에서 흘린 피라는 ‘인’이 방원의 유혈 쿠데타라는 ‘과’로 나타났다는 얘기는 맞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데 ‘만법귀일’화두를 끌어댄 것은 전혀 엉뚱하다. 문자를 잘못 쓴 ‘유식한 척’이고, 화두를 잘못 사용한 무식이다.

(조주 백림선사는 연재 제14∼16회 참조)

증명:月下 조계종 종정·圓潭 수덕사 방장

글:이은윤 종교전문기자 사진:장충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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