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문가 제사상 봤더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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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제사는 ‘가가례(家家禮)’란 말 그대로 집집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종가(宗家)의 제사도 마찬가지였다.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의 제사는 그 규모가 크고 회수가 잦은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도 가풍에 따라 달랐다. 조선 중기 청백리로 이름높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43)은 제사를 간소히 지내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뜻을 좇은 후손들은 한 해에 한 차례만 제사를 지냈다. 진주 류씨 종중(宗中)은 문중의 묘역을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와 같은 형태로 정비해 제사를 지낸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22일 전 16권으로 완간한 『종가의 제례와 음식』(예맥출판사) 시리즈에 담긴 내용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2년부터 전국 종가 27곳을 찾아가 제사음식 조리법과 진설 방법 등을 사진·도면·동영상으로 기록해왔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그 명맥마저 끊겨가는 종가 제사의 면면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시리즈는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93) 종가에서 출발해 사학의 거장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 ‘어부사시사’의 주인공인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 종가 등을 다뤘다. 조선시대에 큰 공을 세워 4대 뿐 아니라 영원히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락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낸 명문가들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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