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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여자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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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여자친구랑 헤어진 한 남자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발적으로 강원도 여행을 결정한다. 그런데 정선 버스터미널에 내려보니 실제로 온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시작부터 황당한 여행은 갈수록 엉뚱한 방향으로 꼬인다. 펜션에서 우연히 만난 옆방 여자, 옆방 여자의 ‘사업 파트너’라는 남자와 술을 마시게 된 남자. 그는 여자의 은근한 유혹에 키스까지 한다. 대취해 정신을 잃은 남자가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 눈밭에 팬티 바람으로 내팽개쳐져 있는데다 지갑과 휴대전화는 온데간데 없다. 예쁜 여자에 끌려 술 마신 죄밖에 없는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술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감독의 실제 주량은 얼마나 될까. “술 세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말 못하겠다”던 노영석 감독은 “컨디션이 좋으면 1차에서 소주 2, 3병 가량 마신다”고 말했다. 개봉관인 서울 소격동 씨네코드 선재에서 인터뷰 내용과 어울리는 사진을 위해 술병 든 포즈를 취했다. [조진영 인턴기자]


◆술과 여자에 약한 자, 그 이름 남자=2월 5일 서울 씨네코드 선재와 CGV 강변·상암 등에서 개봉하는 ‘낮술’은 보는 내내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영화다. 영화의 주제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술과 여자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이니라’ 정도? 남자들의 허술하고 어리석은 구석이 갖가지 우연과 오해, 해프닝 등을 통해 발가벗겨진다. 참 별 것 아닌 듯한 이야기인데, 참 재미나게도 풀어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흐름’ 부문의 최고상인 JJ스타상과 관객평론가상을 차지했고, 로카르노·토론토·테살로니키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 초청이 빗발쳤다. 영화제 초청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고, 올 상반기 중 미국 개봉도 한다.

이 유쾌한 영화에 든 제작비는 고작 1000만원. 10명이 채 안되는 스태프가 13일간 10회 촬영으로 완성한 ‘춥고 배고프게 찍은’ 영화다. 연출을 맡은 노영석(33) 감독은 제작·각본·촬영·미술·음악·편집 등 1인 8역을 했다. 크레딧에 ‘횟집주인’역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실제 나오지는 않고 목소리만 나중에 입혔다. 제작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조명도 쓰지 않았고 가급적 낮에, 야외에서 찍었다. 무대가 강원도가 된 이유도 “여행을 많이 가본 곳이라 장소 헌팅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낮술’의 아이디어는 다른 시나리오를 쓰러 강원도 정선의 한 펜션으로 가던 중 떠올랐다. 주인공이 역에서 펜션까지 산 넘고 물 건너 2시간을 걸어가거나, 고속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주인공에게 자꾸 말을 거는 등 웃음을 연발하는 에피소드는 모두 그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자꾸 말을 거는데 너무 귀찮더라고요. 그때 문득 ‘만약 이 아주머니가 아니라 예쁜 아가씨였어도 내가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홍상수 영화 닮았다?=‘낮술’은 “홍상수 영화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남녀 관계를 통해 인간의 감추고 싶은 속내를 절묘하게 들춘다는 점에서다. “홍 감독님 작품 중에서 ‘생활의 발견’을 제일 좋아해요.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만 가지고도 이렇게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 감탄스러웠어요.” 음주 장면을 위해 배우들과 실제로 술을 마시는 홍감독처럼, 그도 배우·스태프와 밤낮 없이 술자리를 가졌다.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술값으로 나갔단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낮에 촬영을 하니 술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가 대부분이었어요. 두어 장면 빼고는 진짜 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배우들도 한두 잔 정도는 걸치고 연기를 했죠.”  

2003년 서울대 공예과를 졸업한 이후 줄곧 ‘백수’였던 그는 ‘낮술’에 쏟아진 호평에 마냥 기쁘다.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 공모를 포함해서 웬만한 시나리오 공모에는 다 내봤는데 내는 족족 떨어졌어요. 중앙일보 시나리오 공모도 안 됐어요(웃음). 밤마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냉면집 주방에서 육수 만들기 등 일을 거들면서 용돈을 벌었죠. ‘낮술’ 제작비는 어머니가 전액 투자하셨어요. 외아들을 믿고 흔쾌히 내주신 돈이니 하루빨리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기선민 기자 , 사진=조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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